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이나 행복 개념에 관해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 본 분들이라면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인데, “행복은 소득 수준과 비례한다”라니.
어설픈 사이비 심리학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결국 돈이 최고라고 하는 케케묵은 물질만능주의를 주장하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과연 그러한 추측이 타당한지, 지금부터 설명해 보고자 한다. 행복과 소득 수준 간의 관계. 한 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가?
대중뿐 아니라 심리학자들 역시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던 주제다. 심리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해 왔다. 왜냐하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주장의 과학적 타당성과는 별개로 온갖 사회적·정치적 공격들에 시달릴 공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간 있었던 심리학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행복과 소득 수준 간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상관관계가 있더라도 그 정도가 매우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가난하더라도 결코 행복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행복과 소득 수준 간 관계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프이다. 특정 소득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행복과 소득 수준은 정비례한다. 의식주 등 생계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마련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지지나 삶의 의미, 주관적 안녕감 등 행복을 뒷받침해주는 요소들을 안정적으로 세워나갈 토대가 구축될 수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특정 소득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면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의 양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래프의 기울기는 완만해지고, 여전히 행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돈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행복-소득 그래프는 유명 심리학자 메슬로우(Maslow)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인간의 욕구에는 종류가 있고, 위계가 있고, 우선순위가 있다는 내용에 바탕을 둔, 그의 ‘욕구 위계 이론(Hierarchy of Needs Theory)’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먼저 충족되어야 할 욕구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다.
먹고 자고 생활하는 기본적인 터전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행복과 직결되는 요소인 소속감/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를 추구할 수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행복-소득 그래프, 그리고 메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이 시사하는 바는, ‘돈’이란 행복 그 자체라기보다는 행복을 가꾸어가는 데 필요한 기본 환경을 제공해주는 울타리에 가까운 물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복-소득 그래프가 언제나 위와 같은 형태로 재현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과 소득 수준 간의 관계성을 검토한 다른 한편의 연구들에서는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은 물론 심리학자들마저 두려워 마지않았던, 충격적인 결과가 나타나고 말았다.
바로 “행복과 소득 수준이 정비례”한다는 내용의 결과가 종종 보고되었던 것이다.
이제 심리학자들은 행복과 소득 간 관계에 대한 단 하나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 행복은 소득 수준과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행복과 소득 수준은 정비례한다. 이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결과들이 나타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만약 위와 같은 질문을 듣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여러분은 행복한가, 불행한가? 행복하다면 얼마나 행복하며, 불행하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만약 이 질문들에 답을 낼 수 있었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행복/불행 여부를 판단한 것인가? 여기 가능할 법한 두 가지의 관점이 있다.
- 첫째, 주관적-인식적 맥락에 의거하여 답을 내는 것이다. 이는 온갖 외부조건에 관계없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행복 수준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 둘째, 객관적-평가적 맥락에 따라 답을 내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는 경제력이나 외모, 품성, 학벌, 인맥, 여가 활동의 질, 집안 배경, 사는 곳, 배우자의 능력 등 여러 가지 수치화할 수 있는 항목들을 토대로 자신의 생활 수준을 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행복에 대한 진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행복과 소득 수준 간 관계에 대한,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결과들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행복의 측정 당시, 이 두 가지 관점의 차이가 존재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렵더라도, 타인들의 생활 수준과 비교했을 때 행복한 편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객관적-평가적 맥락). 반면, 돈이든 집이든 자동차든 애인이든 가진 것은 하나도 없어도 자신의 삶을 행복하다고 마음먹을 수 있다면 행복한 편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주관적-인식적 맥락).
행복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다양한 행복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들 행복 연구들을 더욱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이해하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실험 참여자들이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에는 두 개의 맥락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사실 두 맥락을 구분하는 것은 비단 ‘행복 연구’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심리학 연구에서의 많은 개념은 객관적-평가적 맥락에 입각하여 측정되었느냐, 주관적-인식적 맥락에 입각하여 측정되었느냐에 따라 상이한 양태를 보일 때가 잦다. 가령 ‘똑똑한 정도’에 대한 측정을 진행한다고 할 때, 실험 참여자가 학업 성적이나, 상장의 개수 등을 토대로 응답을 했다면 이는 객관적-평가적 맥락에 입각한 답변이다.
반면 실험 참여자 스스로가 보기에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다고 느끼는지 고려하여 답변을 했다면 이는 주관적-인식적 맥락에 따른 답변이 될 것이다. 연구자는 정확한 가설 검증을 위해, 그리고 과학의 필수 요소인 반복 검증(replication)의 용이성을 위해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 이 두 가지 맥락이 어떻게 고려되었는지 밝혀줄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들에서 객관적-평가적 맥락과 주관적-인식적 맥락을 구분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심리 척도 상단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덧붙일 수 있다.
- ‘지인들과 비교해볼 때~’
-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때~’
- ‘귀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 ‘귀하가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연구자는 묻고자 하는 문항 앞에 이러한 단서들을 붙여 실험 참여자가 객관적-평가적 맥락, 혹은 주관적-인식적 맥락을 통해 답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리고 논문 작성 후, 다른 연구자들이 쉽게 맥락을 구분할 수 있도록 ‘지각된-(perceived-)’이라는 표현을 넣기도 한다.
지각된 자기 효능감, 지각된 행동적 통제, 지각된 가치 등의 표현이 눈에 띈다.결론적으로 심리학 연구를 접할 때는, 어떤 맥락에서 실험 참여자들이 응답했을지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행복-소득 수준 간 관계와 같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의 경우에는 그 중요성이 배가된다.
만약 연구자가, 혹은 연구 내용을 전달하는 언론 등의 매체가 상기 맥락에 대한 언급을 (비)의도적으로 빠뜨렸다면, 행복 연구에 대한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에 심대한 타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독자의 입장에서 응답 과정에 개입되는 두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심리학 연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심리학 연구를 들여다볼 때, 실험 참여자에게 ‘어떤 질문이 주어졌는가?’에 한 번 주목해보자. 참여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만한 질문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의 의도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심리학 연구 비판을 위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