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5일 광복절,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이어 온 건국절 논란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에 질세라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은 “국가라는 게 성립하려면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듯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의 발언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그는 또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신하고 1948년 태어난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까지 내세우며 문 대통령의 경축사를 반박했다.
류석춘 위원장의 발언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1783년에는 파리협정으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고, 1789년 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취임했다. 류 위원장의 논리대로라면 미국의 건국 시점은 1789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1776년을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한 해로 여긴다. 심지어 류 위원장이 국부로 숭상하는 이승만조차 공식문서에서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았다. 류석춘 위원장에게 정치학 교과서 대신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김용남 작가가 쓴 『대세 세계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정치사 위주의 통사를 다룬 역사서와 달리 주요 사건을 정치·경제·문화 측면에서 골고루 들여다본다. 공당(公黨)의 혁신위원장이라면 편협한 사고 대신 역사의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저자의 말처럼 역사는 정치뿐 아니라 기후 변화, 과학 기술 발전, 경제 체제 변화 때문에 바뀐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니 말이다.
『대세 세계사』는 동양, 약소국, 피지배층, 여성, 유목민족의 삶을 관통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선거권이 행사된 원인으로 기존 역사책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자 계층이 대거 전쟁에 참여하고, 군수 공장 등 일터에서 일하는 여성 비중이 늘어난 것을 꼽았다.
하지만 영국의 에멀린 팽크허스트 등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적극적인 투쟁의 결과로 선거권이 확대됐다는 게 이 책의 시각이다. 그동안의 역사 서술은 서양, 강대국, 지배층, 남성 위주였기에 더욱더 돋보이는 지점이다.
논란이 된 1919년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를 전후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고, 신해혁명으로 청이 몰락하자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또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권을 놓고 다퉜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이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아 무늬만 민족자결이었고, 류석춘 위원장이 말한 국가의 3요소가 끼어들 계제가 아니었다.
저자는 이 시기를 ‘외세에 저항하는 아시아 민중’으로 서술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배는 그 후유증이 컸다. 르완다, 소말리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인위적인 국경 나누기와 인종, 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망자와 난민이 발생하고 소년들조차 총을 들고 소녀들이 강간을 당한다. 막상 식민 종주국들은 약간의 구호품 전달만으로 이러한 현상을 외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에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얼마 전 종영한 tvN ‘알쓸신잡’에서 인생의 책으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이자 초대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꼽았다. 네루가 약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며 딸에게 쓴 편지 196회 분량을 엮어 펴낸 것이다. 네루는 이 책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균형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다.
『대세 세계사』를 읽다 보면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현대에 맞게 각색하고 확장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류의 내용도 책의 곳곳에 숨어 있다.
“유럽을 바꾼 네 개의 사과라는 말이 있지요. 그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파리스의 사과, 기독교를 상징하는 이브의 사과, 과학 혁명을 상징하는 뉴턴의 사과, 자유와 인권을 상징하는 빌헬름 텔의 사과입니다. 거기에 정보화 시대를 상징하는 사과인 애플을 추가하고 싶네요.”
이러한 저자의 유머와 내공은 수십 개 국가를 배낭여행 하면서 세계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글로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득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불거진 건국절 논란이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덮어두었던 역사책을 다시 펼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류석춘 위원장 말고도 균형 잡힌 시각의 세계사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세계사 점수를 높이고 싶은 고등학생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한다. 이 책의 저자 김용남 작가의 조카가 한 달 만에 세계사 점수가 4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라갔단다.
“역사란 무엇일까요? 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 의지가 준거 집단을 넓혀가면서 상호 대립하며 투쟁한 결과 나선계단처럼 순환해가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원문: BOOKLO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