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수주의자 조·중·동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많은 사람이 간파했을 터이다. 혹자는 반대진영의 논조를 읽음으로써 균형을 취할 수 있지 않으냐면서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물론 진보주의자들 중 이런 충고를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수주의자들이 내게 하는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치고 한겨레, 경향 등을 읽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보수만큼 심한 수꼴들도 찾아보기 힘든데, 그들이 나더러 균형감각을 권유한다. 소가 웃을 일이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다. 나아가 웬만한 소리라면 들어보겠지만, 편견과 왜곡으로 가득 찬 그들의 얘기를 들을 시간은 내게 없다.
경제학만 보자. 내가 자주 분류하지만, 경제학은 강한 당파성을 갖는다. 권력 지형의 관점에서 볼 때 주류와 비주류로 나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경제학은 신고전학파 경제학(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이들은 현재의 체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며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보수경제학’이다. 이 체제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자본가, 그중에서 상위 1%의 ‘최상위부자’(super-rich)들이니,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기득권자와 부자 곧 엘리트들의 처지를 대변해 준다.
대한민국 대학 경제학 교수 중 90% 이상이 바로 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다. 경제가 최우선 과제가 되다 보니 ‘경제학’이 모든 사회과학의 여왕으로 추앙받는다. 경영학은 물론이고 사회학, 정치학 심지어 인문학마저 주류경제학, 곧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면 대부분 신고전학파 경제학으로 세뇌되었다고 봐야 한다. 아니라고 손사래 치겠지만 아무튼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일종의 ‘무의식적인 문화’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은 대단히 큰 문제를 유발한다.
첫째, 대다수가 하나의 문화로 통일되면 그것을 쉽게 절대불변의 진리로 오인하게 된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적 신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학문이 종교로 타락한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는 일종의 도그마(dogma)다.
도그마에 빠지면, 다른 의견은 괴이하게 들린다. ‘다름’은 ‘틀림’으로 오인된다. 도그마는 이해력을 극단적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교조 주의는 일종의 자폐증이다. 교조 주의자는 이 세상의 다름을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된다. 다름을 폄하하거나 조롱하는 꼰대로 진화한다.
셋째, 공부가 안 돼서 신경질이 나듯이 이해가 안 되면, 증오심이 싹튼다.
교조주의는 필히 다름을 증오하게 된다. 교조 주의자들은 다수의 힘을 빌어 ‘다름’을 배척하게 된다. 그 결과 종교적 신앙은 깊어진다. 이제 다름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희열과 자부심을 준다. 책 한권 읽은 사람이 가장 용감하지 않던가! 오만하다.
넷째, 신앙은 과학을 부정한다.
신앙인은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 비용을 지출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다수라는 조건 때문에 그런 의지는 한층 약화된다. 다름을 몰라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다름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을 때에도 ‘최소비용’만 지급한다. 그 때문에 교조주의자들은 다름을 편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오독하게 된다. 우리나라 주류경제학자들이 이렇다는 말이다.
어제 타임라인에 링크되어 있는 한 칼럼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중앙일보의 <중앙시평>인데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필자의 논조를 보니 영판 주류경제학의 문화를 철저히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가 자문을 구한 하버드, 스탠포드,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도 주류경제학자들이다. ‘경제신학자’들의 조언을 받은 사람답게 교조주의에 푹 빠져 있다. 내가 앞에서 열거한 네 가지 성격이 글에 잘 용해되어 있다. 그만큼 논리적 빈틈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도그마에 대한 맹신은 물론 다름에 대한 무지, 오독, 편견 그리고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 몇 가지만 사례로 들어 보자.
첫째, 그는 소득주도성장론을 제시하는 ‘포스트케인지안’(Post-keynesian)을 정통(orthodox)인 주류경제학 ‘이단’(heterodox)이라고 지칭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정통은 만고불변의 진리고 이단은 혹세무민하는 사이비로 해석하는 것 같다. 경제학에서 정통과 이단은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정신과 권력 관계에 따라 그것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
비주류경제학, 나아가 포스트케인지언들은 자신들을 기꺼이 이단경제학으로 칭한다. 말도 안 되는 이 기막힌 세상에서 이들에게 이단은 오히려 자랑스런 이름이다! 정통과 이단을 그런 신앙적 방식으로 해석할 양이면 오히려 주류(mainstream)와 비주류(non-mainstream)의 구분방식이 더 과학적일 것이다.
둘째, 소득주도성장론은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가설이기 때문에 위험하단다.
그렇다면 주류경제학은 과학적으로 최종 검증된 학설인가? 과학은 이론과 실증으로 구성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인문학은 근거 없는 신학 위에 서 있다.
‘인간의 합리성은 완전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원자론적 존재다.’, ‘인간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모르는 공리주의적 존재다.’ 곧, 인간은 계산에 능한 개돼지다! ‘인간은 동질적이다.’, ‘저축이 증가하면 투자가 증가한다.’, ‘시장은 완전하다.’ 이런 가정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는가? 오히려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판정 난 가정들이다.
소득주도성장론과 대립되는 성장론은 저비용(저임금) 성장론이다. 저임금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노동자와 서민들을 의식 없는 바보와 순종적 천사, 무기력한 노예, 정치적 무권리 상태로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엄혹하고 무지한 박정희 때나 가능한 일이 지금도 통할까? 민중은 더 이상 개돼지가 아니다. 만일 필자가 소득주도성장론 대시 이런 저임금 성장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는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시대착오적 유물일 것이다.
그는 소득주도성장론을 혁신성장론과 대비시키며, 후자가 주류경제학의 성장론이라고 우긴다. 정말 무식하다. 주류경제학은 ‘균형’의 미학을 사랑하는 경제학이다. 혁신은 균형을 항상 파괴한다. 그건 주류경제학 교과서를 휴지로 만들어 버린다. 성서를 불사르는 사람을 자기 신도로 감싸 줄 목사는 없다.
간단하게 말하자. 혁신성장론은 주류경제학의 성장론이 아니라 비주류경제학의 성장론이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등에서 창조와 과학을, 조지프 슘페터는 『경제분석의 역사』 등에서 혁신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주류경제학을 신랄히 비판했다. 두 사람을 아무도 주류경제학자로 포함하지 않는다. 비주류경제학은 불균형의 경제학이며, 불균형은 바로 지식과 혁신 때문에 발생한다. 번지수와 족보를 잘 알고 주장해야 한다.
셋째, 글 내용을 보아하니 이런 생각도 들어 있는 듯하다. 홍준표가 한 발언을 뉴스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이런 성장론으로는 나라가 망했다’는 생각일 것이다.
과학의 두 번째 요건인 실증과 관련된 내용이다. 미국을 제외한 유럽은 전후 복지지출을 늘였다. 노동조합의 힘도 강하다. 대략 소득주도성장론을 적용시킨 나라로 볼 수 있다. 복지국가 혹은 수정자본주의국가로 불리는 이 나라들이 정말 망했는가?
나는 독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비는 거의 무료였다. 그 덕분에 나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독일 학생들이라고 다 부자는 아니다. 학비를 걱정하는 가난한 학생들이 태반이다. 그들도 나처럼 공짜로 대학을 다녔다. 소득보조(이를 ‘이전소득’이라고 부른다)의 결과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고, 그들의 삶의 질은 개선되었다. 그렇다고 독일경제가 망했는가? 만보를 물러나 미국보다 성장률이 낮았다고 치자. 의료보험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은 교육 받지 못하면서 고도성장한 미국과 만민이 성장의 혜택을 누리며 좀 느리게 성장한 독일 중 어떤 경제가 바람직한가? 스스로 답해 볼 것이다.
넷째, 가장 유치한 문장이다.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은 운동권경제학’이라는 내용이다.
운동권경제학이라는 그의 말 속엔 비현실적, 낭만적, 비과학적, 잡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과연 그럴까? 포스트케인지안 경제학의 원조는 케인스경제학이다. 케인스경제학은 수요측 경제학(demand-side economics)이다. 신고전학파경제학은 공급측 경제학이다.
누가 옳든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하지만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 공급측 결함 때문이 아니라 수요측 결함에서 발생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곧, 공급부족이 아니라 ‘유효수요부족’ 때문에 세계경제가 파탄 났던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케인지언은 케인스경제학이라는 튼튼한 학설과 지극히 현실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은 대략 두 가지 전통으로 갈린다. 첫째가 조안 로빈슨(Joan Robinson)과 니콜라스 칼도어(Nicolas Kaldor)이고 두 번째가 미하우 칼레츠키(Michal Kalecki)와 조지프 슈타인들(Josef Steindl)이다. 양쪽의 차이를 여기서 자세히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학연구자들을 위해 하나만 지적하면 전자는 생산설비의 완전가동(full capacity utilization)을 가정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의 불완전 가동(below capacity utiization)을 전제하면서 ‘수요주도성장론’ 모형을 구축한다.
로빈슨과 칼도어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갖춘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다. 칼레츠키와 슈타인들 역시 그렇다.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 파지네티(Luigi Pasinetti), 민스키(Hyman Minski)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다. 경제학설사를 제대로 배운 주류경제학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노벨상 수상위원회가 다양한 색깔로 구성되었더라면 모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어야 할 대학자들이다.
노벨경제학상은 ‘신고전학파경제학자들의 집안잔치다’
(‘벌 대신 상 주는 노벨경제학상’, <인문학으로 이해하는 경제학 광장>, 한성안 2015),
칼럼의 필자가 자문을 구했던 하버드, 스탠퍼드, 시카고대 주류경제학들이 “소득주도 성장론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면, 필히 경제학 공부가 안 된 사람들일 게다. 그런 중요한 자문에 응할 정도라면 유명한 ‘케임브리지논쟁’ 정도는 알아야 한다. 교조주의에 빠진 경제신학자들에게 다름은 우스꽝스런 잡설이요, 그런 잡설에 대한 무지는 오히려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오만의 극치다. 필자는 얼치기 자폐아나 교조주의자로부터 자문을 받은 듯하다. 포스트케인지안을 비현실적, 비과학적 잡설로 진단하려면, 내가 언급한 저 빛나는 학술논쟁과 이에 참여한 저 위대한 학자들이 혹세무민하는 잡설가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다시 ‘운동권 경제학’으로 돌아가자. 세상에는 정지된 것 없다. 모든 게 움직이고 변한다.
곧, 운동이 사물의 본질이다! 따라서 경제학도 운동(movement)에서 출발해야 한다. 운동이란 바로 현실이다. 움직이는 현실로부터 벗어나 정좌해 관조하는 게 과연 과학적 태도인가? 순간적 포착을 위해 한 번씩 정지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정지를 벗어난 순간 세상은 변한다. 그렇게 되면 정지상태에서 내려진 결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운동과 변화의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면서도 더 과학적이라는 말이다. 정지는 아름답고, 운동은 누추하다는 생각은 편견일 뿐 아니라 비과학적이다. 소설을 쓰려면 그렇게 하라!
운동에 대해 한 마디 더 추가하자. 소득주도성장론자, 더 나아가 포스트케인지안 경제학자들이 운동에서 주목한 내용은 비자발적 실업, 불평등과 불의, 불균형이다. 경제란 무엇인가? ‘경세제민’의 약자로 ‘세상을 다스려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하는 활동’이다. 포스트케인지안경제학자들은 바로 경제의 이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진정한 경제학자인가?
그렇다. 포스트케인지언경제학, 소득주도성장론자는 운동권경제학자다. 그래서 진정한 경제학자들이다. 뭐가 잘못됐나? 나도 운동권 경제학자로 불렸으면 좋겠다. 영광일 텐데, 내가 그 시절 유학생활 하느라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소득주도성장론자들이 “대부분 유학을 가지 않은 순수 국내파”라는 그의 말에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이 말엔 ‘선진국 물도 먹어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와 ‘유학 대열에도 선택받지 못한 실력 없는 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내 경험담으로 시작해 보자. 7년 동안 석, 박사과정을 독일어로 수료하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그쪽의 논쟁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과학적 논쟁방식을 훈련받는 소득을 얻었지만, 외국어로만 공부하다보니 연구범위가 굉장히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효율적으로 논문을 쓰는 건 모두에게 해당되지만, (제2) 외국어로 공부를 해야 하는 내겐 효율적 공부가 더욱 절실했다. 때문에 나는 우물안 개구리 정도가 아니라 ‘논문 안 책상벌레’와 같았다.
나는 언어가 많이 요구되는 ‘이론적’ 주제를 택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 경제학전공자들은 수리경제학이나 계량경제학을 택한다. 만국공통기호를 쓰니 외국어가 많이 필요 없다. 대다수 미국유학파들이 취하는 전략이다. 경제사, 경제학설사는 물론 경제정책 등 ‘언어’로 된 교과공부는 거의 할 수 없다. 이들은 ‘수식에 갇힌 기술자’일 뿐이다. 나를 비롯해 미국유학파들이 국내파 ‘우물 안 개구리’와 나은 게 있는지 모르겠다. 서로의 ‘비교우위’는 인정될지 모르나,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절대우위’를 주장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소득주도성장론을 도입한 홍장표경제수석을 나는 잘 안다. 당시 독일 유학을 마치고 왔을 때, 홍장표교수를 알게 되었다. 귀국했을 때 나는 그의 박사논문을 접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제가 선명하고 분석방법도 참신했다. 당시 운동권경제학자들이 무지하거나 거부했던 간단한 계량적 방법을 도입했던 것 같다. 나는 이론적 논쟁에 집중하느라 당시의 새로운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내가 오히려 이론의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였던 것이다.
그 후 나는 한국사회경제학회와 한국경제학회에 계속 논문을 실었다. 좌파경제학자로서 나는 주로 한국사회경제학회의 논문과 발표를 접했다. 물론 외국학자들의 창의성에는 못 미칠 수 있다. 그건 개인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연구수준의 결과일 뿐이다. 2백년 앞선 그들의 주제를 앞지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학회 대부분의 논문이 외국저널의 논문 못지않았다. 대부분 국내파 학자들의 논문이다.
반면 유학파들의 연구능력은 지극히 보잘 것 없었다. 어느 연구소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유학파박사들이 자기논문을 소개하고 원내 잡지에도 글을 기고하였다. 뭐 이런 논문들도 통과되었는가? 주제가 뭔지 모르겠다. 기고된 글을 보면 ‘국어’가 안 된다. 논리가 뒤죽박죽이다. 같이 근무하던 국내 박사가 거의 대부분을 교정해 출판해야 했었다.
그건 그냥 내 개인의 경험으로 돌리고, 이제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자. 우리 주위에 유학파 박사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들 중 제대로 된 학술지에 논문을 꾸준히 생산해내는 경우를 매우 드물게만 접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학술지에 논문이 없다!
물론 국내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연구란 워낙 어렵기 때문에 박사라고해서 그 과업을 항상 잘 수행할 수는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독 국내파 박사만 그렇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력 없긴 유학파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학위와 연구에는 ‘국적’이 중요하지 않다. 입증될 수 있는 실력이 중요하다.
무지, 편견, 오만으로 가득 찬 보수 일간지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배울 게 없을 뿐 아니라 엉터리 정보를 얻어 우스꽝스런 사람으로 될 수도 있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