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10월 26일 《경남도민일보》 보도 글입니다.
마산 여양리 뼈 무덤의 비밀
“비가 억수로 쏟아졌지. 그때가 아마 음력 6월 중순쯤 됐나 몰라. 그러고 나서 한 달도 채 못돼 여기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니까.”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의 박 모 씨(68)는 이렇게 49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진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되기 전이었으니까 적어도 음력 6월 17일(양력 7월 31일) 이전이다.
어쨌든 1950년 7월 하순쯤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다. 오전 8시쯤이었다. 진주시 반성면에서 국도를 따라 10여 대의 군용트럭이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발산고개를 넘고 있었다.
트럭 적재함에는 모시 한복을 입은 민간인이 가득 타고 있었고, 모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었다. 발산고개를 지난 트럭의 행렬은 봉암리를 지나 양촌리 대정마을로 접어들었다. 잠시 차를 멈춘 후 지휘관인 듯한 장교가 내렸다. 차림새로 보아 보통 군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등굣길에 이 모습을 목격한 박 씨는 그들을 헌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장교는 지서를 찾았고, 곧이어 전투복 차림의 지서장과 순경들이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은 양 사방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인 채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트럭은 적재함 난간을 올려세운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어. 트럭 한 대에 약 30여 명이 탔으니까 그들이 모두 앉으려면 자리가 비좁았을 거야. 그래서 서 있었던 거지.”
지서장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장교는 결심한 듯 다시 차에 올랐다.
“그때 아마 총살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 같아. 마산형무소까지 데려가 봤자 죽이려면 다시 끌고 나와야 할 테고, 어차피 죽여야 할 사람들이니까 번거로움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주민들 시체수습 동원
트럭은 대정마을을 지나 대량·거락·샛담·들담·옥방을 지나 여항산 골짜기로 통하는 둔덕마을 아래 저수지 앞에 정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은 행정구역상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에 속했다. 군인들은 총을 겨눈 채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을 끌어내렸다. 흰 광목천에 의해 굴비 두름처럼 엮여 있었다.
둔덕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 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저수지 옆 작은 골짜기에는 금굴이라는 폐광이 있었다. 군인들은 이곳 금굴 근처의 멧등거리(묘지)로 민간인들을 끌고 갔다.
곧이어 산을 찢어발기는 듯한 총성이 둔덕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서울 쪽에서 전쟁이 났다고는 하지만 여긴 총소리가 귀할 때였어. 그때까지 이곳에선 전투가 없었거든.”
- 문 모 씨(남·71·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
“그때 우리는 겁이 나서 집안에 처박혀 있었지. 총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누가 나가볼 사람이 있겠어.”
- 김 모 씨(여·91·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총성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물이 개울물에 씻겨 내려오기 시작하더라고. 그때 비가 안 왔다면 피비린내가 더 진동했을 거야.”
200명은 족히 넘는 민간인을 이렇게 학살한 군인들은 다시 지서장을 찾았다. 그에게 죽은 사람의 숫자를 말해주고 “혹시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철저히 확인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마산 쪽으로 사라졌다.
명령을 받은 지서장은 그동안 집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시체를 치우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둔덕과 옥방마을의 2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이 일에 동원됐다. 과연 군인의 예상대로 온몸에 총을 맞고도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시체를 묻어주고 온 시숙이 벌벌 떨면서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더라’면서 엉엉 울더라구. 그런데 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살려줄 수가 있나. 어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
- 김 모 씨(여·77·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마을 사람들은 시체끼리 엮어 놓은 광목을 낫으로 자른 후 인근 폐광(금굴)으로 옮겼다. 그러나 시체가 워낙 많아 이내 금굴이 가득 찼다. 굴 입구를 돌멩이로 막은 후 다른 곳에 구덩이를 팠다. 거기에 또 수십 구의 시체를 묻고 흙과 돌을 덮었다.
삼대독자 경찰서 또 총살
“여름이라 시체 썩는 냄새가 워낙 독해 사람들이 코피를 흘릴 정도였다. 시체를 묻은 곳에서는 며칠 동안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참다못한 마을 사람들이 며칠 뒤 다시 흙을 퍼 나르기도 했다.”
당시 2차로 지게에 흙을 져 나르는 작업에 참여했다는 박 모 씨(65·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는 “요즘도 그들이 묻힌 곳을 지나가려면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곳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은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보도연맹원이라고 한다. 이후 생존자 1명이 사흘간 숲속에 숨어있다가 배가 고파 마을에 내려왔으나 마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그를 지서에 신고했다. 그는 다시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하동출신의 삼대독자’라는 사실이 전해졌다.
이밖에도 당시 군인들이 일러주고 간 숫자가 시체의 숫자와 7~8명 정도 차이가 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살아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한다. 둔덕 골짜기의 대학살극은 주민 증언에 의해서만 전해질 뿐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주민도 모두 60대 중반 이상의 고령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잊힐 가능성도 없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70대 할머니 한 분은 기자가 당시 학살사건을 묻자 “그때 비도 참 억수로 왔지….” 하면서 얘기를 꺼내려다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할머니가 옆구리를 툭 치니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부턴 아무리 설득을 해도 “우리는 모른다”며 시치미를 뗐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조심해 이 할망구야. 잡아가면 어쩔려구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