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의 2가지 공로
대한민국 5,000만 명 인구 중 5분의 1인 1,000만 명이 관람한 ‘천만 관객 돌파 영화’는 20~30대 청년층과 40~50대 중·장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극장의 주 고객 20~30대 청년층의 SNS에 올리는 평점, 리뷰 등 입소문이 그 출발점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입소문은 중·장년층의 관람을 이끕니다.
그리고 영화 〈택시운전사〉가 천만 영화로 등극하고 질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택시운전사〉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첫째, 1980년 5월 정권탈취(쿠데타) 신군부(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 장서리, 노태우 9사단장 등)가 대한민국 시민을 대상으로 발포 및 구타·살해를 자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10일 동안 165명이 숨졌습니다. 평균 나이 27세. 그 가운데엔 대학생 13명, 고교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생 2명이 포함됩니다. 행방불명자는 65명, 부상 후 완치가 안 돼 병사한 사망자는 376명.
25년이 지난 2005년. 5.18 유가족 대표단체들이 합동으로 첫 공식 집계한 통계를 발표합니다. 이에 의하면 5.18 관련 사망자는 중상으로 인한 후유증 사망자를 포함해 606명으로 나타납니다. 계엄군 사망자는 23명. 이 중 14명은 공수부대와 향토사단 간의 자체 오인사격으로 사망합니다. 5.18 관련 시민 1,394명이 구속 연행되고 427명 기소, 7명이 사형, 12명이 무기형을 받았습니다.
둘째, 군부 쿠데타 세력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면서 광주 소식을 원천봉쇄합니다. 영화 중에 광주 지역신문 기자들이 공수부대의 잔학한 진압장면과 시민들의 피해 상황을 보도한 신문을 제작 시도하자 신문사 간부진이 이를 막고 윤전기를 꺼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5월 20일 “역사를 기록하자”며 비장하게 제작했던 《전남매일신문》 1면 톱기사 「18, 19일 이틀 동안 계엄군에 학생, 시민 피투성이로 끌려가」 「민주화 부르짖다 숨지고 중태」는 신문 제작 조판대가 군부의 압력을 받은 임직원들에 의해 엎어지면서 신문에 실리지 못합니다.
방송사는 “북괴의 사주를 받는 간첩들이 광주에 침투,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폭도들과 야합, 공권력을 탈취, 시민들을 위협하는 무정부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했고 급기야 광주 MBC 사옥은 불태워집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공동사직서
2014년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책 『5·18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은 5·18 당시 신군부의 무참했던 광주 시민 학살과 언론 검열·탄압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 중앙일보 광주지사가 모든 통신수단이 두절된 상태에서 어렵게 서울 본사로 보낸 ‘공수부대의 무차별 살육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가담’, ‘금남로 시민 학생 무조건 구타, 칼로 찌르고 여학생 옷 벗겨’ 등의 기사도 지면에 게재되지 못했다.
- 광주학살 이후 군부는 언론장악을 시도, 1980년 7-9월까지 1,000여 명의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키고 40여 개 언론사를 통폐합했다.
혹자는 위 사실들이 쉽게 믿기지 않을 겁니다. 지나간 슬픈 역사에 둔감한 이들에게 영화 〈택시운전사〉는 국가의 배신과 시민의 저항권을 깨닫게 하고, 언론의 역할과 책임을 새삼 자각하게 합니다.
2. ‘광주사태’라고 불러라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호남의 중심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광주사태’라고 불렸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태’는 대단히 부정적인 호명입니다. 사회 안정과 발전을 위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돌발적 사변을 의미하지요.
1980년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흘 상황은 한동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불문율에 싸여 있었습니다. 대신 비제도권의 진실들은 지하 문건과 귓속말로 숨죽이며 흘러 다녔습니다. 1980년 집권 군부세력은 ‘광주를 말하는 자는 국가 내란을 획책하는 자’라는 압제 프레임을 드리웠습니다.
1995년까지도 ‘광주사태’라고 호칭하다가 국회가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합니다. 1997년엔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역사 교과서에도 정식 명칭으로 기술했습니다.
3.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기까지
12·12사태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기간 내내 강력한 언론통제를 실시합니다. 그때 서울 광화문 주변 신문사는 인쇄 직전에 곧 발행될 지면의 대장(臺帳, 기사 사진 제목 등을 거의 실제 신문처럼 제작한 초벌구이 지면)을 시청에 있는 계엄군 언론검열관에게 확인 도장을 받아야만 윤전기를 돌릴 수 있었습니다.
언론검열관이 삭제하라고 표시한 기사는 대장에서 들어내야만 했습니다. 광주를 현장 취재한 소식은 원천 삭제되기 일쑤였습니다. 대신 신군부의 주의주장이 크게 나갔습니다. 이 기가 막힐 일들은 1980년 실제 있었던 상황입니다. 신문 방송은 권총 찬 계엄 권력 앞에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보도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미디어는 총체적으로 무장권력의 앵무새였습니다.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5월 열흘간 광주에서 일어납니다. 한번 ‘광주사태’로 낙인 찍힌 뒤에는 수십 년 동안 지역적 편견과 네거티브 이미지 한중간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기존 프레임은 오랜 기간 “빨갱이 폭도들이 일으킨 유혈 폭동의 난리”라는 극단적 편견으로 꾸준히 존속되어 왔습니다.
좁아터진 이 땅에서 특정 지역을 깎아내려 정치적 우월을 과시하려는 재래식 ‘완장 의식’은 웃지 못할 역사의 퇴행이었습니다.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일방적 프로파간다와 이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미디어에 의해 ‘5월 광주’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시민의 자위권이 폭도의 광란으로, 양심의 표현이 사회불안 야기로 뒤범벅되고 말았습니다.
4. 왜 시민이 총을 들었나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
영화 〈택시운전사〉는 광주시민의 시각에서 그려지지 않습니다. 서울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과 독일 방송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의 제3자적 관점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됩니다.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억지로 주입하지 않으며, 담담하고 차분한 감정 묘사가 장점입니다. 판에 박힌 연출 공식을 마다하고 쥐어짜지 않는 공감대가 되레 관람의 미덕이 됩니다.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문제 제기를 하는 전남대학교 대학생들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곤봉에 두들겨 맞습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너무 잔인해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까지 봉변을 당합니다. 다음날 늘어난 시민 학생 항의 대열. 어디선가 애국가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자 시위 중인 시민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서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합니다.
이를 신호로 광주 금남로에 도열한 무장 공수부대의 M16 총구가 불을 뿜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실입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계엄군이 비무장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시위대는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형, 누나, 동생, 아들, 조카였습니다.
영화는 시민들의 평안한 일상, 그리고 그 일상이 어떻게 처참하게 파괴되는지 찬찬히 보여줍니다. 방금 대화한 혈육이 주검으로 변해 리어카에 실려 왔을 때 스스로 광주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절박함에 시위대는 무장을 합니다. 이제 시민군이 됩니다. 민가에서 주먹밥이 전달되고 교련복을 입은 고교생까지 총을 잡으려 자원합니다.
5. 광주를 왕따시켜라
1980년대 내내 우리 시대 의식 있는 지식인과 문인은 ‘5월 광주’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책감을 느껴왔습니다. 이 죄의식은 바로 광주에서 벌어진 그 국가 폭력 사태에 아무런 항의조차 못 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됩니다. 문제의식을 자각하고도 그저 침묵했고 자기 안위와 허위의식에 무릎 꿇었다는 양심이 작동되는 것입니다.
광주는 특별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른 바 없었습니다. 그런 광주는 5월 그 열흘 내내 외부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광주 시민은 외롭지 않다! 우리 도시도 비정상적 신군부의 탄압에 항의한다! 광주시민을 더 이상 죽이지 말라!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계엄군은 물러가라!” 이런 소식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광주 소식을 제대로 내비친 뉴스 한 꼭지를 듣지 못합니다. 이미 광주는 대한민국 ‘非광주’ 전체에 의해 ‘폭동의 도시’로 낙인찍힙니다. 언론 보도는 모두 ‘폭동’ 프레임을 만들었습니다. 광주는 시대의 ‘왕따’ 자체였습니다.
외부로부터 차단당하고 고립무원 속에 정권찬탈 세력에 맞서는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빨갱이 폭도’라는 시뻘건 불도장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란 타의적 낙인은 영원한 타자(他者) 틀 짓기입니다. 불구대천의 적(敵)인 것입니다. 권력자가 항거하는 피권력자에게 구사하는 빨갱이 낙인은 전가의 보도입니다.
정당성이 결핍된 권력은 애꿎은 지점을 찾아내 붉은 색칠을 시도합니다. 진실이 군홧발에 무력하게 유린당할 때 유일하게 항거한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광주 그 이후, 시대의 범죄자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시민이 시민의식을 발휘하고도 그 흔적을 침묵 속으로 잠수시켜야 하는 이 아이러니… 연약하고 취약한 한국 시민사회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며 겨우 싹을 틔웁니다.
6. 전두환, 난동 시 자위권 발동 강조
2017년 4월 《한겨레》는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전두환 씨가 자위권 발동(발포) 등 무력 진압에 직접 관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나왔다고 단독 보도합니다. 한겨레가 확보한 육군 제2군사령부(영호남·충청지역 관할)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을 보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국방부 회의와 관련해 ‘전(全) 각하(閣下):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한겨레는 ‘전 각하’는 전 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군인은 상부 명령을 받고 행동합니다. 석 달 후 장충체육관에서 희한한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전두환은 99.9%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피의 살육작전 최고위급 명령권자는 “29만 원”을 움켜쥐고 연희동에 건재합니다. 전 씨는 올봄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에서 ‘나는 광주사태 치유·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다’ ‘계엄군 발포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광주를 희생양 삼아 갓 피어난 민주주의를 공포로 바짝 압살했던 그들의 발포명령 하달과정 규명은 미궁에 빠져있습니다.
원문: 편집자의 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