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샬롯츠빌에서 ‘대안우익 (alt-right)’ 라 불리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과거 노예제의 상징이던 남부연합의 깃발을 휘날렸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남부연합 깃발을 휘날리며 시위를 주도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맞불 집회를 놓아 둘 사이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관련기사 : 2017년 샬롯츠빌 사태와 한국의 보수우익)
한국에선 조용했지만, 미국에선 큰 사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딱히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양비론을 펼쳤단다. 이에 미국 시민들은 크게 환호하고 크게 분노했다. (관련 기사: 美 트럼프 우군들 등 돌려…샬러츠빌 “쌍방에 책임 있다’)
샬롯츠빌의 시장인 마이크 시그너는 얼마 뒤 뉴욕타임스에 아래와 같은 글을 기고한다. 영어 제목은 “Charlottesville will move on”인데, 이걸 의역하면 대충 “샬럿츠빌은 이겨낼 것이다” 정도로 되지 않을까.
마이크 시그너 시장은 글에서 헌법에 기초한 제도도 시민들이 그 헌법정신을 잃으면 무의미해지고, 혐오를 막기 위해 백인우월주의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역행한다고 말한다.
비록, 백인우월주의자의 시위가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며, 그 가치를 이루는 길목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역으로 미국의 헌법에 쓰여 있는 표현의 자유가 정말로 광범위하게 보장되어 있는 증거라고도 말한다. 따라서, 단순히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처벌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신이자 그 답은 무엇일까?
마이크 시그너 시장은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Democracy, like a muscle, needs to be worked out. But it’s not mere stimulus and response. We now have to make the right choices. What does this mean, practically?”
민주주의는 근육과 같아서 단련하지 않으면 퇴행하기 마련이다. 물론, 단순한 자극과 반응을 통한 단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극고 반응을 넘어 ‘올바른’ 운동을 해야 한다. 아래는 그 올바른 운동의 예시들이다.
- 시장은 다양한 사회의 주체에게 올바른 행동을 하길 바란다. 언론사, 학교, 기업, 정부 모두가 사회에서 이탈된 – 유리된 – 소수자들을 위해 사회적 헌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 언론사는 단순한 사실확인기관이 아니라 그 사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그 사실의 맥락은 무엇인지 말해야 하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 정치인의 일은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같은 책상에 앉아 협상을 하는 것이지, 말도 안되는 폭탄을 던지거나 뛰쳐나가선 안된다.
- 대학교는 시민성과 가치를 배양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 정부는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사회에서 고립되어 고통 받는 수많은 커뮤니티를 다시 사회와 연결시킬 수 있게 나라를 구성해야 한다.
정확히 6년 전, 노르웨이에서도 극우 조직에 의한 무차별 테러가 일어났다. 무려 76명이 사망했는데, 사건으로 인한 충격보다 얼마 뒤에 있던 당시 총리의 연설문의 충격이 더했다. 자국의 국민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총리는 분노보다 화해를, 절망보다 희망을 담아 연설문을 작성했다. (관련기사: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개방성, 인간애‘)
테러에 대해 단순하게 대응할 것이 아니라 소외된 자들을 품을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개방하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도록 인간애를 키우자고 말했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나온 테러에 대한 답은 민주주의였고, 2017년 샬롯츠빌에서 나온 답은 또다시,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라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구조가 우리의 먹고 사는 데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며, 어떠한 가치가 사회에 우선되느냐가 우리의 경제적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4글자는 허공에 떠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허무하다. 이걸 증명하기 위해선 민주주의라는 4글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4글자 밑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수많은 열매들을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관련된 것은 헌법일텐데, 헌법을 고쳐서 사회가 뭐가 변하냐, 그게 중요하냐 라는 말이 나올 거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신이 담겨있는 헌법을 고치는 개헌은 실상 사회구조를 바꾸는 과정이다.
직선제 개헌이 근본적 경제 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군사정권이 독재를 하던 나라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바뀌는 시발점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로 바뀌면서 사회 – 경제적 변화에 시민들의 목소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떠올리면 마인드맵처럼 나오는 단어가 표현과 사상의 자유다.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었냐? 라고 물으면, 밥은 주지 않아도 밥을 만들 수 있게 전기밥솥은 주었다고 말하겠다. 문제를 공론화할 수도 있고, 제보할 수도 있고, 본인의 사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배포해 돈을 벌 수도 있다. 좀 망상과도 같은데, 우리가 감탄하며 들었던 넉살과 우원재 그리고 행주의 가사는 결국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여성주의, 성소수자, 빈곤층 등등의 문제를 논하고 공론화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물론, 지금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꺼내는 게 촌스럽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다.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는데, 그거 구해줄 나랏님이라면 독재자라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도움안된다. 민주주의에 목을 매달며 열심히 공부해봤자 인적성 책 한 권 읽는 것보다 못하다. 학보사 기자들이 열심히 써내려간 학보사의 신문들도 결국 짜장면 덮개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껍데기처럼 들릴 때, 그깟 사상과 토론이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 될 때마다 노르웨이총리의 연설을 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성찰과 반성이라면,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거추장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민주주의의 공로다.
민주주의를 의심하고 사람을 싫어하고, 인류애가 없다고 말하는 게 그리 특이하지만은 않은 시대다. 인종은 당연히 차별해야 하는 거고, 성도 당연히 차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은근히 ‘쿨하다’라고 추종받는 시대다.
인간애가 떨어지는 시대에 유일한 대응책은 결국 인간애라는 게, 좀 웃프다.
원문: 구현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