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Storytelling).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너도나도 스토리텔링을 말한다. 이제 박제된 스펙들로는 안 된단다. 스펙과 스펙을 이어 줄 수 있는, 감성이 묻어 나는 이야기가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있어야 좋은 대학, 좋은 대학원에 갈 수 있다.’, ‘이야기가 있어야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 ‘이야기가 있어야 고객을 감동하게 할 수 있다.’ 이제 상식 아닌 상식이 되어 버린 말들이다. 그렇다고 스펙의 중요성이 낮아졌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닌 것 같다. 스토리텔링은 스펙을 대체하지 않았다. 스펙에 얹혀 입시 준비자들을, 구직자들을, 마케터들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감동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스펙들 사이사이에 서사를 부여하고, 통일감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훌륭한 ‘스토리텔러(storyteller)’로 거듭날 수 있을까. 요즘 사람들의 주요 고민거리다.
자기소개서 컨설팅, 학업계획서 컨설팅, 기획서 컨설팅, 사업제안서 컨설팅 등등 온갖 종류의 컨설팅 영역에서 주로 강조되는 것 역시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라는 주문이다. 천편일률적인 스펙 경쟁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건져 올린, 차별화된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쟁력을 어필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야기책의 주인공처럼 살아오지 않았다. 남들 다 하듯 학교 가고, 공부하고, 영어 점수 따고, 면접 준비하고, 직장 가고, 상사에게 적당히 꾸지람 들어가며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다. 특별히 모자랄 것도, 넘칠 것도 없는 그런 삶.
면접장에 있을 때 말고, 우리가 평소 으레 정의하곤 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라는 요구가 버겁다. 밋밋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내 삶을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포장’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
내 인생은 평범하다. 특별하지 않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어쩌면 스토리텔링을 가로막는 최대의 주범일 것이다. 억지로 꾸미자니 부자연스러운 것 같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니 어딘지 모르게 ‘없어’ 보일 것 같다. 그래서 지난날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며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를 생각하자니 머리가 아프다.
특별한 것이 뭐 없었을까, 하며 해묵은 일기장도 뒤져보고 인터넷 블로그나 홈페이지 등에 끄적거린 글들도 찾아본다. 평소 잘 안 보던 앨범들도 꺼내어 들춰보고, 그것도 안 되면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서 부모님, 친척, 오랜 친구 등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남들 다 해봤을 듯한 경험들이라 영 내키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곧 ‘나’의 인생인 것을. 좀 평범하면 어떤가. 그것이 곧 부정할 수 없는 내 인생의 단면들인 것을. 요즘 자존감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무척 뜨겁다. 자존감에 대해 말하는 책도 정말 많아졌고, 사람들의 입에서도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연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자존감에 대해 보고, 읽고, 듣고, 말하고 있지만 자존감이란 사실 생각보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힘겹게 배우고, 외우고, 익혀야 할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아주 약간의 생각 변화면 된다. 단지 이렇게 생각해보자. ‘평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내리깔지 않는다. 역으로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내리깔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평범해도 내 인생이다.’ 이게 자존감이다.
애초에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핵심은 진정성에 있다. 조금 서툴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사람 냄새가 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 곧 많은 사람이 갈구하는 스토리텔링의 실체다. 남들하고 비슷하면 어떤가. 그것이 내가 살아온 길이고, 내가 경험해 온 ‘이야기’들인데.
누구에게는 뻔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것만큼 인생에 있어 중요한 기억도 없는데. 결론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쓰든, 비슷한 어떤 것을 쓰든 ‘남들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보다는, ‘스스로 가장 가치 있었고, 즐겁고 행복했으며, 의미 있었던 이야기’를 찾았으면 좋겠다. 때론 평범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가장 진실한 이야기일 테니까.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