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시작하면서 과연 나는 그 ‘미래’의 크리에이터에 포함될지 궁금해졌다. 만약 이 미래가 10-20년 뒤를 얘기한다면 저 능력이 나나 내 세대에 필요할까? 스스로 되묻기도 했다. 어쩌면 이 글은 지금 현업에서 열심히 일하며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광고인이 아니라 미래의 광고, 아니면 크리에이티브와 관련된 일을 꿈꾸고 있는 학생이나 초년생들에게 더 도움 될 것 같다.
오히려 나같이 ‘걸쳐 있는’ 광고인들이 가장 많이 고민된다. 미래에 경쟁력 있는 크리에이티브를 새로 익혀야 하나, 쭉 해온 전통광고를 더 끌로 파야 하나(‘끌로 판다’는 건 더 깊이 파고든다는 뜻의 광고 업계 용어다), 하는 고민이다. 10년 전 광고회사 제작팀 신입으로 광고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략 3-4년 전까지는 업계가 크게 바뀌는 느낌은 없었다. 어쩌면 대기업 계열 광고대행사에 있어 그전부터 부는 변화의 바람을 더 늦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15년을 기점으로 젊고 능력 있는 소규모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가 생겨나고 드라마나 영화, 인터랙티브 업계 사람들이 광고업계에 발을 들인 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이 변화는 외면하려야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클라이언트로 이직하게 된 것도 그 시기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계기가 된 것 같다.
지난 2년 동안 클라이언트로서 일하면서 느낀 변화는 단순히 광고를 넘어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광고업계는 디지털이나 뉴미디어 같은 기술적 수단을 연구했지만 그보다 큰 관점에서 소비자들이 크리에이티브를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게 느껴졌다.
미래의 소비자가 원하는, 미래의 소비자에게 통할 크리에이티브를 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시대가 요구했던 것과 다른 능력이 필요함을 알았다. 요즘 유행하는 코딩교육 같은 테크니컬한 것이 아니고 좀 더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 가지로 정리해보려 한다.
1. ‘빅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
만약 당신이 대형 광고회사의 제작팀에서 일하면 대부분은 15초, 또는 30초라는 규격에 맞춘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이 매체 규격은 지금까지 크리에이터의 수많은 가능성을 거세시켜 버렸다. 거대한 서사, 깊은 울림이나 감동, 또는 이벤트나 기술에 기반 둔 아이디어들은 이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몇 가지 사례를 알려드리니 미래의 광고인은 이런 선배들의 피드백에 상처받지 말기를 바란다. 못된, 아니 못됐다기보다 현실적인 선배는 대담한 아이디어들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너 학생이냐 광고인이냐?” / “광고주가 원한 건 TV 광고야.” / “근데 이거 누가 할 건데?”
좀 착한 선배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은데 이건 킵해두고 TV 콘티를 좀 더 생각해보자.”
쫄지 말자, 어쩌면 그중에 빅 아이디어가 있을 수도 있다. ‘빅 아이디어’는 매체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어울리는 매체를 찾으면 된다. 뉴미디어를 활용한 것이어도 좋고, 수백만을 동원하는 이벤트여도 좋고, 15분짜리 영상이어도 좋다. 다만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빅’이 아닌 그냥 아이디어다.
누구나 낼 수 있는 아이디어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고 있을 것이다. 제약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업계 선배에게 유리하다. 그들은 제약 아래 답을 찾는 것을 더 잘한다. 미래의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당신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당신은 ‘빅’을 생각해라. 웃길 수도, 울릴 수도,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 ‘빅’ 아이디어의 힘이다.
‘Love Has No Labels’ 캠페인
2. 아이디어의 결과물을 ‘예측’해내는 능력
‘선제안’ 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묘한 이름의 캠페인이 있다. 말 그대로 클라이언트가 요청하지 않는 솔루션을 에이전시에서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대부분 에이전시의 크리에이티브 열망에서부터 시작한다. 만약 제안을 받은 클라이언트가 이 선제안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한다면 에이전시는 좋지만 한편으로는 결과물에 대한 부담은 커진다.
광고회사에 있을 때 선제안 캠페인을 매년 한 건 이상 진행했고 그중 몇 개는 해외광고제 수상 등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만들고 나서 보니 크리에이티브 면에서도 부족하고 소비자 반응도 미지근한 캠페인이 많았다. 좋아 보이는 아이디어였는데 왜 그랬을까?
함께 캠페인을 진행한 동료들과 천천히 복기해보니 결국 시작부터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는 아이디어는 정말 좋아도 기술적 한계, 섭외 실패, 잘못된 연출, 예산 부족 등 여러 이유로 생각한 대로 실행되기 어렵거나, 실행되더라도 처음의 그 상상과는 많이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아이디어였음을 발견했다.
15초 TV 광고라면 결과물 예측이 상대적으로 쉽다. 반복된 훈련과 경험으로 쉽게 ‘감’이 생긴다. 하지만 미래에 더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이 결합한 콘텐츠를 만들 당신이라면, 당신이 만들 콘텐츠는 어쩌면 전에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딱히 비교할만한 그 무엇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럴수록 결과물의 완성도와 임팩트를 캠페인 시작 전에 예측해내는 능력은 더더욱 요구된다.
미래의 크리에이터들이라면 초기 단계의 아이디어를 보고 결과물이 어떨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꿀팁 하나 알려드린다. 상상해 본 결과물이 초기 아이디어만큼 안 나올 것 같다면? 시작하지 마라. 99%의 결과물은 당신이 기대한 것 이하로 나오기 마련이다.
캠페인을 망치고 나서 클라이언트에게 ‘이런 캠페인은 우리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이디어는 정말 좋았는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클라이언트라면 그런 에이전시를 이해하며 용서해주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는가? 둘 중에 하나도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은 이 능력을 꼭 갖춰야 한다.
3. 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실행’할 능력
한마디로 ‘실행력’ 이다. 재작년에 실행한 ‘통일의 피아노’ 캠페인을 예로 들어보겠다. 아이디어는 꽤 심플하고 강력했다. ‘분단 60년을 기억하기 위해 휴전선의 철조망으로 악기를 만들어, 그 악기로 평화통일을 노래하자’는 것이었다. 이 캠페인을 통일부에 제안했고 통일부는 이 선제안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풀어야 할 숙제 몇 가지가 있다. 아주 큰 숙제만 언급하겠다.
- 휴전선의 철조망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 철조망으로 악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 이 악기를 사람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약속하건대 이 세 문제 중에 하나만 해결해줄 사람이 있다면 다음 캠페인을 함께 할 파트너로 진지하게 고려해보겠다.
- 수십 개의 연락처와 인맥을 동원하여 결국 휴전선에서 수거한 철조망을 구했다.
- 철조망으로 악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젝트 공명’ 팀과 몇 달간 함께 개발했다.
-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두 달간 전시되었고, 광복절에는 예술의전당 통일음악회에서 국립합창단과 함께 피아노가 연주되었다.
어떻게 풀었는지 간단하게라도 쓰고 싶지만 쓸 수 없으니 아예 안 쓰겠다. 이 캠페인이 내게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말로만 가능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결국 멋지게 실행해 냈기 때문이다. 미래의 크리에이터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생각과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런 악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만든 이들까지도.
오랜만에 쓴 글이 많이 길어졌다. 짧게 정리해보자면 미래의 크리에이터들은 세 가지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 빅 아이디어: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를 내는 것
- 결과물 예측: 초기의 아이디어에서 결과물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 어떻게든 실행: 예측과 근접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
어쩌면 이미 구세대 크리에이터일 나도 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테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머잖은 미래에 필드에서 만나서 크리에이티브로 겨룰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