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랑 똑같이 해주세요.”
“네?”
“아,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이거랑 그냥 똑같이 만들어주세요.”
“….”
디자이너로서 일정 수준 이상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아니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디자인을 그대로 복제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표절에 해당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라는 점이나 기술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그보다도 먼저 맥락과 상관없이 표현만을 복제하는 것이 디자인의 본질이 아니며, 둘째로 디자이너로서 오리지널리티를 훼손당한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깎아 먹는 일임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다.
먼저 맥락적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디자인은 어떤 해결책이 효율적이라는 논리적 판단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맥락이 무시된 단순 표현은 디자인이 아니라 ‘변형’일 뿐이다.
전문적인 디자이너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어떤 디자인을 기획하고 결정할 때 누릴 소비자층의 특성과 디자인 결과물 자체의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효율성, 목표 등을 고려하고 반영한다.
여기에 자신의 독특한 감성을 살짝 가미함으로써 ‘표현 형질'(특별히 ‘표현 형질’이라는 말로 칭한 까닭은 디자인의 영역이 확장되어 시각 표현뿐 아니라 청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 영역에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이 완성될 때에 이를 디자인(Desig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인 형태를 재구성하여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맥락과 환경이 고려되어 비교적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일 것으로 판단되는 방향으로 감각적인 표현 형질을 구성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어떤 형태의 구성은 특정한 맥락에서 좋은 디자인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완전히 나쁜 디자인이 될 수도 있다.
현대 디자인에서 브랜딩이나 사용자 경험(UX)이 주목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을 빌려 설명하자면, 한 디자인 대상이 따르고자 하는 이데아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들을 모두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제한이 따른다. 이때 디자인은 이 이데아 간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현실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요소들을 고려해 재배치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이 디자인한 주전자는 이러한 디자인의 특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단순히 상징적인 기능에 초점을 맞춘 이 주전자는, 실제로 사용하기엔 너무도 비싸고 불편하다. 열의 전도성이나 세척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전자는 디자이너가 생각한 얼개 안에서 강한 기능성을 가진다.
찬장에 전시되거나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는 공간의 분위기를 살려준다. 손님은 이것이 무엇인지 묻고, 주인은 이에 대해 설명한다. 조용하던 모임 자리의 좋은 대화거리가 될 것이며 집주인의 마음을 뿌듯하게 할 것이다. 그 비싼 가격 이상으로.
디자이너의 전문성은 사용되고자 하는 기능적 맥락, 효율성과 생산, 유통, 재질 등 현실적인 가능성이라는 차원의 두 축을 얼마나 잘 조합하고 버무려 완성하느냐에 있다.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의 어원이 외형적 묘사나 시각적 표현 등을 뜻하는 말이 아닌 라틴어 ‘designare (계획을 기호로 나타내다)’에서 유래한 것임을 보아도,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적이고 계획적인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시각적 기호로서 표현되는 경우가 많고 계획적 구성 속에 감성이라는 요소가 고려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영감적인 요소가 중요한 것뿐이다.
소결하면, 어떤 다른 대상의 감각적 표현이 좋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표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표절이나 가짜에 대해 냉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남의 노력에 쉽게 편승해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점이 악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과물 자체의 질이 나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깊이 있는 통찰 없는 단순 표현의 반복은 결과물의 질을 떨어뜨리며, 나아가 창작자 자신의 수준을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둘째로는, 독창성이다.
독창적 디자인이란 디자인 맥락에 디자이너 본인의 영감과 감성을 입혀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자인의 독창성은 맥락적 디자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난 글부터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바와 같이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창의란 ‘디자인의 목표에 부합하는, 가장 이상에 가까운 현실적 대안’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때 현실적 대안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것이 경험과 공정에 대한 이해라면, 이상에 가까워지는 방법을 주는 것은 디자이너의 영감과 감성이다. 현실성만 갖추려고 하면 모든 제품이 유사한 구조와 기능,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독창성이라는 요소를 주는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직관이다.
베스트메이드(Best Made)의 도끼를 보면, 도끼라는 제품의 기능성에서 구조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음에도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감성과 영감이 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쌓이면서 브랜드의 감성을 형성하고, 이미지를 만든다. 이렇게 오리지널리티가 형성되면서, 디자인과 브랜드는 힘을 갖는다.
문제는 이러한 감성이나 영감에 대한 이해 없이 형질이 단순히 재표현되는 것은 오리지널리티를 갖지 못하며, 그 결과 디자인과 브랜드의 가치가 손상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이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며 오랜 투쟁 끝에 간신히 조금씩 색깔을 가져가고 있다.
팔로워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압도적인 기술 혁신을 강조해왔고, 기존의 많은 효자상품을 디자인 아이덴티티 통합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폐기했다. 많은 반향 끝에 이제는 ‘삼성전자의 디자인 DNA’라고 할만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중국의 샤오미 역시 외형적 복제와 공격적인 마케팅을 토대로 회사를 갖춘 기업이다. 샤오미의 경우 단기적인 마케팅 측면에서는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의 복제전략이 주효했던 것은 단순히 외형만 복제한 것이 아니라 맥락 전체를 뻔뻔할 정도로 답습하면서 더 넓은 시장을 아주 공격적으로 공략했기 때문이다.
가격을 저가로 제공하기 때문에 소비시장 자체의 규모가 큰 차이가 있으며, 현지의 생산설비를 사용해 비용도 크게 감소시켰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애플(Apple)을 복제하여 활용하였다. 그러면서도 제품군을 잘 구성해 애플 제품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소비자 시장이 싸우지 않고 겹칠 수 있도록 하여 애플이 구성해 둔 맥락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한 샤오미는 미투(모방) 브랜드라는 인식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독창적으로 개발하는 제품에 대해서조차도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라 있다. 출발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깎았으며, 한계를 만들다. 이 상황에서 ‘샤오미의 디자이너’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개인이 과연 좋은 평가를 받거나 스스로의 작업에 만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어떤 정해진 일정한 규칙이나 방법론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디자인은 수행될 때마다 새로운 맥락 속에서 새롭게 고려되어야 하며, 해당 시기를 반영하는 직관이 입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대상에 대한 고려만이 아닌, 다양한 환경이 반영되어야 한다. 특히 시시각각 많은 것이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창작이 이뤄진 순간 이미 흘러가는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참고하되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단순히 외적 형태를 만드는 기술자적 역할에서 벗어나 논리와 감성을 조화시킨,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디자인은 경쟁력 있는 결과물을 창의할 수 있으며, 좋은 결과물을 통해 디자인 전반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강화할 수 있다.
원문: 장영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