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으로 이렇게 모서리를 강조해줌으로써 첨단적인 느낌을 강조해 보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음… 좀 더 첨단적인 이미지를 원했는데, 이런 게 첨단적이지 않나요?
아…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다시 수정해보겠습니다.
디자인 업무를 진행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소통 과정에서 생기는 이미지의 간극일 것이다. 분명히 충분한 논의 끝에 특정한 이미지를 정하고 그에 맞춰 작업을 진행했는데, 나중에 이야기해보면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을 생각하고 있던 경우가 있다. 때문에, 디자이너에게는 언어적인 능력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똑같은 말을 다르게 느낀다
우리는 언어적인 표현을 이미지로 상상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것을 그린다. 각자가 경험해온 바가 다르고 가지고 있는 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의 ‘첨단적’이라는 언어만 봐도 그렇다.
‘첨단적’이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시대적으로 앞선 그 끝에 있을 때 우리는 첨尖단端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첨단의 개념은 굉장히 상대적이다. 기술적인 요인과 트렌드 등을 반영한다. 어떤 시대의 첨단이 현대의 첨단과 같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지난 글에서 언급한 신기효과와도 연관이 있다. 즉, 새롭고 충격적인 조형은 첨단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들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첨단을 느낄지도 모른다. 금속판을 절곡하여 미니멀한 외형으로 풀어내면서도 그 형태는 유기체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러한 건축은 비용이 많이 요구되고 기술적으로 구현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흔히 보기는 어려운 구조체이다. 위의 요인들 때문에, DDP 건축은 첨단적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위의 시그램 빌딩과 같이 직선적이고 정형적인 선에서 첨단을 느낀다. 유리로 지어 올린 비현실적인 고층 빌딩은 비록 여러 차례 복제되어 지어졌지만 아직까지도 그 인공적인 절제미를 통해 첨단적인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두 사례 외에도, 첨단적이라는 감성의 스펙트럼은 개인마다 다양할 수 있다. 공유하는 감성이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분화되는 조형요소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단순히 첨단적인 느낌을 강조하려 하다 보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공통분모에 도달할 수 있다.
세세하게 쪼개어 생각해야 한다
즉, 디자인 가치에 대한 의사소통의 오류는 언어를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우리가 평소에 발화하는 언어의 의미 범위와 시각적 언어의 의미 범위가 다르기 때문인데, 쉽게 생각하면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종종 발생하는 문제와도 유사하다.
예를 들어, ‘영리하다’는 말은 smart나 clever, intelligent 등으로 번역되어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셋의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며,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수도 있다. 공유하는 기저의 의미는 있지만 표현에서 분화되는 것이다.
이미지는 또 하나의 기호적 언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위의 감성을 형상으로서 구체화시키는 과정은 ‘첨단적’이라는 한국어 표현을 ‘이미지어’라는 어떤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다만 언어적인 기호와 시각적인 기호는 그 특성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한국어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것 이상의 세밀한 뉘앙스 구별이 필요해진다.
좀 더 실행적으로 다시 이야기하면, ‘첨단적’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상위에 두더라도 세부적인 형태에 대한 묘사가 더욱 갖춰져야 한다. 즉, 색감은 어떠한지, 전체적인 조형은 어떤 느낌의 형상인지, 레이아웃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효과들은 어떤 감성인지 등이 제시되었을 때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첨단적’의 스펙트럼 속에서도 어떠한 부분인지가 명확해진다. 클라이언트는 세밀한 고민을 통해 어떤 이미지가 기획에 맞는지를 고민하여 제시해야 하며, 디자이너는 그러한 이미지가 조합되었을 때 상위 개념인 ‘첨단성’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좋은 디자이너는 좋은 번역가다
좋은 디자이너는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강해야 한다. 언어적인 설명을 듣고 조형요소들을 세세하게 쪼개나가면서 클라이언트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니즈를 분석해낼 때 원하는 결과물을 제안할 수 있다.
또한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는 뒤로 진행될수록 반발을 얻고, 그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방향으로 임시방편적인 요소를 추가하면서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결과물이 좋게 나오기 어렵다. 기획을 통해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군더더기가 붙으면서 모호해지고 결국 디자이너 스스로도, 클라이언트도 납득하지 못하는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디자이너는 언어적인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구현 기획이며, 좋은 구현 기획은 잘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표현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기획을 잘 듣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모호성 등의 문제로 인해 전혀 다른 결과물이 생성될 수 있다.
클라이언트 역시 언어적인 표현이 시각화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모호한 표현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디자인 결과물이 나올 거라 기대하는 것은 눈을 가린 채 총을 쏘면서 표적지에 맞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대한 목표물을 조준해도 맞추기 힘든데, 최선의 노력 없이 좋은 총을 구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목표한 결과를 바라기는 어렵다.
언제나와 같이,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문제이다. 다만, 언어의 시각화가 갖는 모호함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출발한다면 불필요한 오해와 마찰을 줄일 수 있고, 보다 협조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면서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모두가 윈윈(win-win)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프로젝트는 언제나 구성원 모두의 유기적인 협동 속에서 탄생한다.
원문: 장영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