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10년 넘게 대기업에서만 근무하다가 최근 중견기업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책임과 권한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하면 그 사람의 일이 되더라고요. 사내 인프라도 열악하고요. 어떤 프로젝트를 하려면 최소한의 투자가 필요한데 그러한 투자에도 인색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과는 내야 하고. 쪼임은 계속 당하고. 어떻게 해야 하죠?
Answer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오랜 기간 ‘대기업 근무환경’에 익숙해진 분들은 아마 이러한 상황이 낯설고 생소할 겁니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글로벌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신 분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고요. 하지만 국내 많은 기업의 근무 환경이 실제로 이와 유사하고, 많은 분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하면서 높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환경에 처음 접하신 분들, 이렇게 일하는 것이 불편하신 분들이죠. 아무리 경력이 우수하고 업무역량이 뛰어나더라도 업무방식이나 근무환경이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으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한 경우 조기 퇴사로까지 이어질 수 있고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이러한 회사를 뭉뚱그려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라고 부릅니다. 반드시 나쁜 회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장단점이 분명하기에 ‘나랑 잘 맞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잘 맞으면 ‘헤븐’이지만 안 맞으면 ‘헬’일 수 있습니다.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의 특징
(1) 조직의 R&R이 불명확하다
첫 번째 특징은 조직의 역할과 책임(R&R: Roles & Responsibility)이 불명확하다는 겁니다. 가령 어떤 업무가 기획팀 역할인지 전략팀 역할인지 물어보는 부서마다, 또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답변이 다릅니다. R&R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경력직을 채용할 때 JD(Job Description)가 없는 경우가 많죠. 입사 전 약속받았던 직무와 다른 직무가 주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심지어 조직도가 없는 회사도 있습니다. 조직도에는 일반적으로 그 회사에 어떤 부서가 있는지, 보고 체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이 표시되어 있죠. 또 조직도에 기술돼 있는 부서명으로 부서의 R&R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고요. 하지만 조직도가 없을 경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힘들고 단지 ‘겐또’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일 가능성이 높고요.
조직도는 기업 기밀 사항이라서 일부러 작성하지 않는다는 회사도 있는데 이건 말이 안 되고요. 실제로는 조직도를 그릴 수 없기 때문에 그리지 못하는 겁니다. 조직의 R&R 및 보고체계가 불명확한데 어떻게 조직도를 그릴 수 있겠어요? 조직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항을 모두 명확하게 정의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부서 간 이해 충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서 못 그리는 겁니다.
(2) 업무가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따라간다
조직의 R&R이 없다 보니 자기 상사가 누군지 모르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가령 오랫동안 전략팀장을 하던 분이 인사팀장으로 발령 났어요. 전략팀장은 공석이 됐고요. 그런데 사장님은 이 친구가 아직도 전략팀장인 줄 알고 전략팀 지시를 인사팀장한테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전략팀원들은 옛 상사인 인사팀장에게 계속 보고를 하는 거죠.
새로운 전략팀장이 왔는데도 전략팀원들은 예전 팀장인 인사팀장에게 보고합니다. 인사팀장은 사장님으로부터 계속 전략 관련 숙제를 받아오니까요. 이런 식으로 사내 공식적인 전략팀장은 한 명인데 전략 업무를 하는 비공식적인 전략팀장은 여러 명인 경우가 발생합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직무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의 예에서 전략팀장을 하다가 전략팀장이 공석인 채로 인사팀장으로 발령받은 친구는 두 업무를 겸직하겠죠. 하지만 능력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 ‘파워 부서’ 팀장의 자리를 놓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절대로 겸직을 해서는 안 되는 감사실장이 사업부의 헤드를 겸직하는 경우도 봤습니다. ‘정상적인 대기업 근무환경’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3) 사내 인프라 및 시스템이 열악하다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는 상대적으로 사내 인프라 및 시스템이 열악합니다. ‘휴먼 파워’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인프라 및 시스템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이죠. 이런 회사는 ‘사람만 잘나면 안 되는 일도 되게 한다’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인프라 투자를 최소 규모로 유지합니다. “오 부장은 그런 투자 없이도 했는데 왜 너는 못하냐?”는 식이죠. 아니, 어쩌면 이런 논리는 투자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4) 사람에게 책임과 권한을 일임한다
이런 회사의 특징 중 주목할만한 게 하나 있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담당자에게 책임과 권한을 확실하게 일임한다는 겁니다. 보통 대기업은 제안 부서 따로 있고 실행 부서 따로 있죠. 전략부서의 역할은 전략을 제안하는 데에서 그치고, 실행에 대한 책임은 담당 사업부로 넘어가는 게 일반적인 대기업의 경우입니다.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에서는 전략 제안자에게 실행 책임까지 넘어갑니다. “그럼 네가 한번 해봐” 하면서요. 책임에 필요한 권한까지 모두 일임하죠. 사실 전략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건 ‘드림 컴 트루’입니다. 내가 수립한 전략을 직접 실행할 수 있으니까요. 전략하는 사람이 가장 아쉬운 게 자기 전략이 빛을 못 보는 거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직접 실행할 권한을 주는데. 하지만 이게 말처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5) 사람만 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회사의 특징은 사람을 정말 잘 쫀다는 겁니다. ‘책임을 지기 위해 필요한 권한을 일임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부여받은 권한만큼 책임을 진다’는 얘기입니다. 즉, 권한을 받는 그 순간부터 성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죠. 실제로 권한을 받는 순간부터 ‘실적 쪼임’은 시작됩니다. 이런 회사일수록 사람을 쪼는데 탁월한 기술과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담당자는 핑곗거리도 없습니다.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죠. 무슨 핑계를 대겠어요. “권한이 없어서”라고 하면 “그 권한 줄게”라고 하시겠죠. “사람이 부족해서”라고 하면 “네가 필요한 사람 뽑아”라고 하시겠죠(단 회사 채용기준을 만족하는 사람을 뽑기는 쉽지 않죠). 그럼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해야 합니다.
(6) 그런데 R&R이 불명확해서 조직간 협조가 잘 안 된다
내가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것 같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권한은 있는데 실행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조직 체계가 잘 갖춰진 회사는 대표이사 한 마디에 모든 조직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회사처럼 R&R이 불명확한 회사는 권한을 행사해도 조직이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권한만 받았지 조직은 넘겨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조직은 넘겨받았어도 조직에 대한 평가권은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이사 지시사항이라고 해도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습니다.
“난 모른다. 그런 지시받은 바 없다.”
권한을 100% 실행할 수 있다 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실행을 하려면 관련 부서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먼저 ‘어떤 부서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만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저희 부서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라는 말을 두세 번 듣고 이 부서 저 부서로 튕김 당하는 핑퐁게임을 몇 번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관련 부서를 파악할 수 있고, 관련 부서를 모두 모아 삼자대면을 한 다음에야 협조받아야 할 부서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7) 모든 게 사람의 재량이다
관련 부서가 협조를 해주기로 했는데 생각만큼 잘 안 해주면 어떡하죠? 별수 없습니다. 대인 관계로 풀어야죠. ‘고래사냥’ 가사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안 되면… 뭐, 사정사정해야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회사에서는 평소에 대인 관계를 잘 닦아놔야 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게 사람의 재량입니다.
(8) 결국 ‘인사가 만사’고, 모든 게 사람 책임이다
이런 회사에서는 ‘성과 내려면 사람을 움직여라’ ‘내 사람을 많이 만들어라’ ‘인사가 만사다’라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합니다. 시스템 경영? 그런 얘기 하면 쫑크 먹죠. “아직 우리 회사를 잘 모르나 본데…” 결국 모든 해결책을 ‘사람’에서 찾습니다. 미국 진출 전략이 필요하면 “미국 진출 전문가를 찾아.” 히트 상품 개발이 필요하면 “상품 개발 전문가를 찾아.” 유럽 회사와 전략적 제휴가 필요하면 “유럽 회사 전문가를 찾아.” 심지어 조달금리를 낮추려면 “자금 조달 전문가를 찾아.” 모든 게 기-승-전-전문가로 귀결되죠.
(9) 입·퇴사가 잦다
전문가를 구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겠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라는 사자성어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대단한 전문가일지라도 근무환경이 너무 많이 달라지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글로벌 기업, 국내 최고 기업에서 날고 기는 전문가를 데려와도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탱자’ 밖에 못 되는 겁니다.
기존 직원은 “전문가가 와도 별 것 없네”라고 하시겠죠. 그게 맞고요. 특히 ‘대기업 근무환경’에 많이 익숙한 전문가일수록 더더욱 별 것 없겠죠. 그래서 이런 회사는 직원의 입·퇴사가 잦습니다. 아이러니컬하죠?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인데 사람들의 입·퇴사가 잦으니까요. 잘못하면 ‘사람을 쓰고 버리는 회사’로 오해받겠는데요.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에 임하는 자세
그렇다면 이런 회사에서는 어떻게 해야 장기간 살아남을까요?
(1) 많은 사람에게 ‘기회의 땅’이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런 회사가 반드시 나쁜 회사는 아닙니다. 어떤 분들께는 무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기회의 땅’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아요. 보수적인 대기업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제안을 많이 해도 실행을 못 합니다. 단 한 가지 예외는 있죠. 경쟁사가 먼저 실행해서 성공했을 때. 경쟁사가 유사한 전략을 실행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야지만 비로소 실행을 허락하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하지만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에서는 “이런 제안이 있습니다” 하면 바로 “그래, 그럼 너 한 번 해봐”가 됩니다. “필요한 권한 다 줄게”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하죠. 얼마나 좋습니까? 평소에 하고 싶은 전략 다 실행해볼 수 있는데.
(2)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헬 컴퍼니’다
반면 또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헬 컴퍼니’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회의 땅’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헬 컴퍼니’인 거죠. 대표이사로부터의 권한 부여는 말뿐이고, 관련 부서 협조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 밥은 자기가 찾아 먹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비용이나 투자를 받기도 힘들어요. 잘못하면 ‘맨손으로 밥을 떠먹어야 한다’는 말이죠.
(3) ‘대체 불가능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나만의 대체 불가능한 역량을 보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번 실패해도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집니다. 또 내 역량을 필요로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단지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언제든지 ‘나보다 저렴한 인력’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특히 특별한 역량이 없는 경력직이라면 이런 회사 입사는 꿈도 꾸지 마십쇼. 책임질 수 없는 권한만 잔뜩 짊어지게 되어 마음고생 크게 합니다.
(4) ‘피플 스킬’을 키워야 한다
대체 불가능한 역량을 보유했더라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핵심 성공 요인은 바로 ‘피플 스킬’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보유했더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에서는 자기가 맡은 부분만 잘하면 다른 파트에서 시스템적으로 뒷받침해주지만 이런 회사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한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면 혼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가 적은 인원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내 지식 데이터베이스, 외부 리서치 데이터베이스 등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에서는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런 회사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역량은 사람을 움직이는 ‘피플 스킬’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죠.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일수록 ‘사람을 움직이는 스킬’은 필수. 모든 것은 나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필요한 역량을 보유했다고 판단하면 이런 회사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때로는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쪼임을 견뎌내는 ‘맷집’입니다. 사실 역량이 조금 부족해도 맷집이 강하면 엔간한 쪼임은 견딜 수 있습니다. 예? 맷집도 약하다고요. 그럼 빨리 다른 길을 찾으심이…
Key Takeaways
- ‘사람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회사’는 조직의 R&R이 불명확하고, 사내 인프라 및 시스템이 열악하며, 조직 간 협조가 잘 안 된다는 등의 단점이 있다.
- 잘 맞는 사람에게는 ‘기회의 땅’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헬 컴퍼니’가 될 수 있다.
- 살아남으려면 ‘대체 불가능한 역량’을 보유해야 하고 ‘피플 스킬’이 매우 뛰어나야 한다.
원문: 찰리브라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