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무척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대학교 4학년 가을이었을까, 졸업 작품을 슬슬 마무리할 때 즈음에는 며칠을 연속으로 집중해서 작업하느라 밤도 많이 지새웠다. 며칠간의 밤샘 작업 후에 스스로에게 주는 꿀 같은 휴식으로 방에 들어가 오랜만에 TV를 봤었는데, 그게 SBS에서 특별기획으로 방영했었던 『세계의 명문 대학』이라는 시리즈였다.
세세한 내용은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확하게 기억나는 장면 하나와, 마음에 강하게 도전을 준 꿈 하나가 있었으니- 지구 반대편 세계의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정말 죽도록 공부하는 장면이 있었고,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꼭 한번 그들과 같이 죽도록 공부하면서 경쟁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TV를 보고 나서 나는 휴식을 하기로 했던 마음을 이내 접고 다시 작업실로 향했었다.
그 날 이후 꽤나 시간이 흘러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8년 넘게 다니고서야 다시 미국으로 대학원을 올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의 그 꿈이 다시 떠올라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지나고 보니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체험했던 학교 교육, 그리고 교육과 산업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관계들을 바라보면서 예전에 한국에서 내가 겪었던 교육 시스템, 문화와 비교하며 어떤 것이 다르고 좋았었는지 생각날 때마다 적어두었다.
Design & Tech 부분 교육에서 세계적으로 선도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학교(대학원)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이 많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많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 주입식 교육은 20세기 산업 발달의 근간
주입식 교육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교육 방식을 처음 체계화시켰을 때 어느 나라의 어느 시스템을 참고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때의 것이 그대로 고착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그 교육방식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동안의 주입식 교육이 많은 비판을 받으며 요즘에는 많은 부분 개선되는 중이지만, 내 생각에는 주입식 교육은 그 시대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나고 짧은 시간 내에 고도화된 경제 성장을 이룬 과거를 생각해 보면, 효과적인 주입식 교육만이 정답이었을 것이다. 서구의 발달한 산업을 단기간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토론하기보다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짧은 시간 내에 풀어내는가가 관건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대기업의 초기 성장 동력이었던 ‘Fast-Follower 전략’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그 당시 기업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의 인재상은 ‘일을 효과적으로 빨리 해결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런 분위기에서 학교는 주입식 교육으로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학생들의 능력을 키워줘야 했을 것이다.
2. 변화된 시대에 맞춰 변화되어야 하는 교육
며칠 전 뉴스에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국제 수학올림피아드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다. 이런 뉴스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들었던 이야기라 ‘역시 우리나라 아이들이 똑똑하네’라는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래전에 보았던 ‘국제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우승했던 수학 영재들이 거의 대부분 의대를 선택한다‘는 씁쓸한 뉴스 기사가 떠오른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는 영재들이 왜 결국에는 의대로 몰리는 걸까. 왜 세계적으로 걸출한 수학자나 물리학자, 엔지니어가 배출되는 일은 의사가 되는 일보다 드물까.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유학 온 한국 학생들 대부분의 학기 초반 학업 성취도가 꽤 높은 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한국에서 몸에 밴 학습 태도가 오히려 외국 학생들과 경쟁하는데 나름대로 무기가 되는 것인데, 보통의 경우 언어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부족을 ‘성실과 끈기’로 이겨내는 듯하다. 내 경우에도 유학 초반에는 외국 학생들은 10분이면 읽을 Reading Material을 최소 30분은 꼼꼼히 읽어야 할 정도로 시간 투자는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몇 번의 학기가 지나가고 여러 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난 뒤에 졸업할 때쯤에는 결국 ‘일 잘하는 사람’ 보다는 ‘일을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굳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교육을 하는 방향성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생각과 방향을 다듬어내는 것. 그리고 의견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얻어내는 시너지 효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은 특정한 프로젝트 몇 개를 잘 끝마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다.
이는 졸업 후 회사에서도 비슷한데, 주어진 일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핵심적인 일을 만들어내고 잘 조직해서 이끌어내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 그런 교육 덕분인지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유명한 대기업에 다니다가도 퇴사하고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올바른 정답을 빠르게 구하는 데에만 우리나라 교육이 열중하다 보니, 알파고가 개발한 인공지능의 연산 능력과도 경쟁할 수 있는 영재들을 키워내기에 바빴지, 정작 알파고를 만들어낼 줄 아는 인재를 키워내는 방법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유학기간 동안에 개인적으로 보고 배우고 느꼈던 부분들 중에 우리나라 교육 문화와 시스템에 부족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짚어볼 생각이다.
3. 눈에 보이는 예절보다는 보이지 않는 신뢰
지금은 한국 학교 강의 분위기가 어떤지 몰라도, 한국에서 학교 다녔던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수업 시간에 뭔가 먹다가 혼난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한 번이라도 미국 수업 풍경을 본 적이 있다면 ‘자유로워 보이네’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도 수업 중에 커피나 간단한 간식을 먹기도 하고, 의자에 비스듬이 앉아서 다리를 꼬아서 교수에게 질문하거나, 책상 위에 앉아서 수업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모습들을 보면 처음에는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런 행동들이 단지 ‘미국인들에게는 무례함으로 느껴지지 않는 문화 차이’라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좀 더 깊은 관계가 설정되어있던 것이더라. 교수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본인의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그들이 수업 중에 뭔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그 외 부수적인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 같다.
수업 중에 커피를 마시는 것은 ‘수업 중에 예의 없는 일’이 아니라, ‘카페인이 필요할 정도로 공부에 집중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무언가를 먹는 일도 ‘강의실에서 매너없게 뭐 하는 짓이냐’가 아니라, ‘끼니를 거를 정도로 공부하느라 바빴나보네’라는 기본적인 신뢰가 교수와 학생간에 설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 중에 ‘교수님 커피 한잔하고 와도 되나요?’ 는 질문 따위는 전혀 필요 없는 셈이다.
학생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교수는 학생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최대한 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한국에서는 덜 다듬어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교수와 상의를 하게 되면 ‘음… 그건 좀 아닌것 같은데? 이런 방향은 어떨까?’라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단 한 번도 그런 교수를 본 적이 없었다. 학생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서 교수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학생의 능력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다해봐라, 내가 도울테니’ 라는 적극적인 교수의 지지가 학생들의 잠재 가능성과 능력을 최대한도로 이끌어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신뢰의 관계는 나중에 회사 생활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이어지는데, 예전에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것」에도 적어둔 것처럼, 본인의 업무 퍼포먼스에만 집중하고 출퇴근 시간 같은 부수적인 것들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회사와 조직원, 매니저와 팀원들 간에 깊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한 번이라도 신뢰를 잃게 된다면 그 타격은 어마어마하다)
4. 완성도 높은 작품? 실험적인 도전!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녔을 때에는 한 학기당 3~5개의 수업을 들었고, 각 수업은 2~4개의 프로젝트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서 장단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프로젝트가 종료될 때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식이었다. 크게 보면 내가 겪었던 한국 대학교 강의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잖게 다른 점들이 보인다.
Design & Tech 쪽을 공부했던 나의 경험을 예로 들면- 한국에서는 주로 교수님이 앞에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그 내용을 보고 듣거나 받아 적는 등의 이른바 ‘진도’를 나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프로젝트 진행 후에 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은 미국의 학교와 비슷하다. 프로젝트의 주제가 학생들에게 주어지면 학생들은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를 한다. 그런데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 보이게 되어 본의 아니게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결과가 된다. 결국 교육이 학생들 작업의 높은 퀄리티를 요구하게 된다.
반면에 내가 다녔던 대학원에서는 커다란 테마에 관하여 교수가 화두를 던지거나 큰 컨셉을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레퍼런스를 보여주면, 학생들은 서로의 생각을 아무런 제한 없이 나누고 덧붙이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때로는 토론만 하다가 강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 역시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져서 학생과 교수 간의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프로젝트의 주제도 교수가 던져주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찾아서 교수와 1:1 상의를 하며 본인이 정한다.
당연히 다양한 주제만큼이나 결과물도 천차만별인데, 교수는 작업물의 완성도를 가지고 학생을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완성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긴 하는데, 결과물의 완성도보다는 아이디어와 생각의 전개의 탄탄함, 그 프로세스의 완성도에 대해서 주로 언급한다. 결과물의 완성도에 대해서 자유롭다 보니, 프로젝트에 임하는 학생들의 아이디어에는 날개가 달린다.
프로젝트가 끝까지 잘 완성해서 마무리되든지, 아니면 시행착오의 연속으로 끝까지 완성을 못 하고 마무리되든지 교수는 ‘너 이따위로 해서 성적 받을래?’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 부족했지?’, ‘초반 기획 단계에서 알 수 없었던, 실제로 작업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뭐였지?’라고 물어본다. 프로젝트에 대한 꾸지람보다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워나가길 원하는 셈이다.
내가 무척 좋아했던 한 교수님은 실패에 대해서 늘 이렇게 강조하셨다.
“실패는 너가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험이다. 만약 너가 실험으로부터 뭔가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없고 배움이 없는 학생은 꾸지람을 듣고 비판을 받았지만, 다양한 방식의 아이디어 실험은 언제나 환영받았다.
5. 관심 없는 성적표
위에 적어놓은 소제목이 너무 이상한 게 아닌가 싶겠지만, 정말 그랬었다. 학기 중에 아무도 성적에 관심이 없었다. 단순한 이유였는데- 성적 시스템이 P/F(Pass or Fail) 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월등히 뛰어나게 잘해도 Pass, 적당히 잘해도 Pass, 좀 못했지만 Mininum Requirement를 충족시키면 Pass를 주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남들과의 경쟁이 무의미해진다.
이렇게 되면 공부를 별로 안 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였다. 다른 학생들과 경쟁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끼리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고, 각자 아는 것들과 잘 하는 것들을 서로 공유하는 문화가 생겼다.
그 예로 우리 학과의 경우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수업 이후 밤 9:00부터 한 시간 동안 학생들끼리 Skill Share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가령 어떤 날은 디자이너가 비 디자이너들에게 포토샵을 가르쳐 준다던가, 또 어떤 날은 프로그램에 능한 학생이 초보자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코딩의 팁들을 알려주는 세션이 있었다. 정규 수업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디테일한 내용들을 이 시간을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밤늦도록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이외에도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필요에 따라 “혹시 XXXXX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 메일 리스트에 질문을 올리면, 이전에 경험했던 사람이나 혹은 같은 어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메일 thread를 만들어 가면서 지식이 축적되기도 한다.
대학원 성적 시스템이 A/B/C/D/F가 아니라 P/F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학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산업 현장에서도 성적표가 필요 없는 환경이 뒷받침해줘야 한다.
그 예로 졸업 즈음에 몇 군데의 IT기업에 입사 지원을 했었는데, 성적표 제출이 의무가 아니었고 졸업 증명서만 첨부하면 되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서류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입사가 확정된 뒤에 신분 확인차 참고 서류로 별도로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회사가 지원자의 능력을 평가할 때 성적표가 당락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6. 모두를 위한 기록
학기 중에 들었던 모든 수업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했던 것은 Documentation이었다. 일종의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는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생각했던 아이디어, 발견했던 문제점, 읽었던 참고 서적, 여러 가지로 시도했었던 실험 내용들을 가감 없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2학년 선배들이 Information Session을 열어서 어떻게 개인 블로그를 개설하고 운영하는지 상세하게 안내해주었다. 특히나 인터넷 관련하여 웹서핑만 할 줄 아는 ‘컴맹’들을 위해서 도메인을 구입하고 서버를 개설하고 홈페이지를 설치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무척이나 상세하게 영어로 어렵게 설명해주었다.
개인 블로그에 남긴 Project development process는 담당 교수들이 해당 프로젝트들을 매주 확인하면서 학생과 1:1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어차피 성적도 의미가 없는 마당에 학생들 모두가 그렇게 블로그에 documentation 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교수와의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은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아이디어로 접근했는지 들여다보면서 본인의 생각을 나눠줄 수도 있고,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서 답을 얻게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그리고 documentation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블로그에 글을 남기면서 역으로 본인의 아이디어나 생각의 전개 과정이 탄탄하게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글을 남긴다는 것은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형식과 흐름을 정리 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내가 했던 프로젝트 과정들이 오롯이 내 것으로 흡수된다. 디자이너인 내게는 특히 프로젝트 진행 과정의 상세한 기록들이 나중에 포트폴리오 제작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7. 정답을 찾지 않는 토론
블로그를 통한 공유만큼이나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 바로 수업시간에 이루어지는 토론이다. 한국에서는 수업 중에 누군가 질문을 하는 모습도 찾기 어려웠지만, 반대로 이곳에서는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뭐 저런 것까지 물어보나…’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나중에는 토론에 깊게 빠져들 정도로 토론의 과정은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
수업시간 중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토론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들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정답이 없이 토론이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정답이 없는 토론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정답에 가까운 이야기들과 정답과는 멀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더 새로운 아이디어, 더 새로운 문제, 더 새로운 해결책들이 떠오르게 된다.
처음부터 토론을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해버리면, 토론 참여자 스스로 정답이 아닐 것 같은 이야기를 재단해버리기 때문에 토론의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진다.
한두 시간 격론을 벌이다가 끝내지 못한 채 수업 후에 강의실 뒷편에 서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하면서 생각은 나누어지고 보태져서 힘을 얻게 된다. ‘정답이 뭘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고, 질문자 스스로 그 안에서 정답을 찾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생기게 된다.
8. 팀 프로젝트 단위의 수업
한 학기에 보통 4~6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었는데, 대부분 팀 프로젝트로 2~3명씩 팀이 꾸려지곤 했다. 내가 디자이너 역할을 했으므로 다른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 혹은 그 외의 다른 전문 지식을 가진 학생들과 작업을 했었다.
팀원들이 불어나니 많은 경우 초반에는 의사 결정에 시간이 좀 늘어지게 되면서 프로젝트 진행이 더디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이 붙고 프로젝트 결과물도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아지게 되었다. 내가 좋은 팀 멤버를 만나서 그랬을까? 라고 반문하기에는, 내가 팀으로 진행했던 모든 프로젝트들이 나름대로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팀 멤버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처음에는 혼자 작업을 하는 것이 일정 관리나 일의 집중도 면에서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몇 가지 프로젝트는 혼자 진행했었다. 하지만 초반에는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오지만 결국 디자이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특히 코딩 부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혼자 진행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결국 못 만들게 된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팀 멤버의 힘을 자연스레 빌리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같이 생각이 맞는 팀 멤버들을 찾게 되었다.
팀 단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졸업 후에 회사에서 일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미리 배우게 된다. 비록 결과물의 규모나 완성도 면에서는 회사에서 하는 것들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사용자 테스트, 디자인 검증, 프로토타입 제작, 그리고 최종 프레젠테이션까지 일련의 과정들은 회사에서 하는 것처럼 무척 진지하게 이루어진다.
9. 좋은 팀 플레이어(Good Team Player)가 되기
팀 단위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한 명의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보다는 함께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이끌어 갈 사람을 더 선호한다. (물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좋은 팀 플레이어라면 어느 곳에서나 스타가 된다)
좋은 팀 플레이어를 찾는 것은 졸업 후 취업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많은 회사들이 인터뷰 시에 ‘다른 팀원들과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개발자와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가?’ 하는 등의 질문을 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팀 플레이어를 추려 나간다.
몇 군데의 회사들과 몇 번의 인터뷰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학력과 성적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여기 실리콘 밸리의 분위기를 보건대 단언컨대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팀 플레이어가 되기 위한 요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팀 플레이어의 요건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앞서 썼던 글처럼 팀 멤버들과 모든 것을 공유할 줄 알아야 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 심지어 사적인 부분도 프로젝트 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면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팀원들 간에 서로 신뢰가 쌓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서 신뢰는 팀워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주춧돌이 된다. 소위 ‘될 만한’ 프로젝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찮게 보이는 프로젝트라도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탄탄한 ‘될 만한’ 팀에서는 멋진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는 팀 안에서 ‘내가 전문가다’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주도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한다. 예전에 나까지 포함해서 4명으로 이루어진 팀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 팀 리더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어떤 방향이나 일정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4명 중에 2명은 미국인 학생, 한 명은 중국인 학생, 그리고 한 명은 나였는데, 뭐랄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팀이 두 명의 미국인에 의해서 마지못해 이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잘 이끌어 간다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는데, 명확한 방향성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의견을 냈고 너네가 반론을 내지 않았으니 이대로 간다’라는 식으로는 프로젝트의 예상 결과물이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를 다녔을 때 프로젝트를 리딩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예상되는 프로젝트 일정, 필요한 리소스들, Task List를 세분화해서 계획을 세우고 거의 매일 팀원들과 1:1로 연락하면서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챙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동양인이 뭔가 이끌어가려는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에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그들도,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진행되며 무언가 하나둘씩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내게 ‘캡틴’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면서 신뢰를 주기 시작했다.
나는 팀 멤버 모두에게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했고 (코딩 담당, 그래픽 디자인 담당, UX 디자인 담당, 제품 전시 디자인 담당), 큰 방향성과 일정을 보여주고 무한 신뢰와 함께 멤버들 스스로에게 맡기니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굉장히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본인이 팀 안에서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기여하는 모습은 다른 팀원들에게도 자극이 되고, 결국에는 모두가 하나의 팀으로써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굿 리스너'(Good Listener) 여야 한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다른 팀 멤버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는데, 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상대방의 의견을 아무런 편견 없이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이것을 ‘Active Listen'(적극적으로 듣기)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Active Listening’에 관한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Active listening is a communication technique used in counseling, training, and conflict resolution. It requires that the listener fully concentrate, understand, respond and then remember what is being said. This is opposed to reflective listening where the listener repeats back to the speaker what they have just heard to confirm understanding of both parties.
다른 의미로써의 ‘굿 리스너’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팀 멤버들끼리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내가 상대방에게 가르쳐줄 때도 있고, 상대방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적극적이 되기 쉽지만, 남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가 많이 있다.
함께 학교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할 정도의 동료라면, 최소한 본인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회사에서도 내 주위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면, 신입사원이든 본인이 모시고 있는 상사든 모든 사람들에게 배울 것들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0. 문제 해결 능력이 아닌 문제 발견 능력
‘문제 해결자'(Problem Solver)라는 어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디자이너라면.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통찰력과 아이디어를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개념이었는데, 요즘은 좀 다르다. 왜냐하면 위에 적었듯이 이제 문제는 ‘팀’이 함께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같은 시대에 디자이너에게 특히 더 많이 요구되는 능력은 ‘문제 발견’ 능력이다. 어떤 것이 문제인지 발견되지 않으면 애초에 해결되지도 않기에, 제대로 된 문제를 발견하고 정확하게 정의하는 능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뉴욕에서 공부했을 때에도,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거의 유일하게 질문했던 것은 ‘어떤 것이 문제였는지 발견했니?’, ‘왜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라는 것이었고, 발견한 내용이 대단하게 들리던지 혹은 사소하게 들리든 간에 크게 호응해 주고 다음 단계로 함께 발전시켜주었다.
비단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은 회사에서 일할 때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보통 해야 할 일들이 윗사람으로부터 주어지게 되면 그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대부분 프로젝트는 본인이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발견해내서 더 좋은 디자인으로, 더 좋은 기능으로 제시하는 프로젝트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리소스들(자료, 인력 등)을 찾아내는 것도 스스로 찾아내야 할 영역이다.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면 일을 할 것이 없으므로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기 쉽다.
마치며
짧게나마 미국에서 공부하며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미국 교육의 장점이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만약에 더 좋은 점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억이 미치지 못해서 이 글에 담지 못했던 내용들이 있었다면,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대로 별도로 정리하겠다. 짧은 시리즈를 읽어주심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원문: 히로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