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이 없어지자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고, 그 결과 공교육이 붕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사의 권위를 세우고, 나아가 공교육 악화의 순환고리를 끊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사교육 금지법 제정부터 체벌 부활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런데 교권이 추락한 게 정말 체벌이 금지된 때문일까? 필자는 오히려 체벌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 보겠다.
미국에는 체벌이 없다고? 미국도 부모는 아이를 때린다
미국에서는 체벌을 하지 않는 줄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그렇지는 않다. 교사의 물리적 체벌은 금지되어 있으나, 부모는 자기 아이에게 ‘spanking’이라고 불리는, 주로 아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려 상처 없이 고통을 주는 정도의 체벌을 할 수 있다. 이 정도를 넘어 상처가 남는 폭행을 가하면 중죄로 간주한다.
부모 중 94%가 아이를 키우면서 4살 이전에 한번은 spanking을 아이들에게 써봤다고 하니 그야말로 볼기짝 때리기는 미국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체벌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체벌은 과연 효과가 있을까?
버지니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티모시 윌슨 교수가 <Redirect>(번역본 <스토리>)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Spanking은 아이의 특정 행동을 멈추는 데는 효과적이나 부작용도 많다. Spanking을 당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던 아이보다 공격적이었고, 반사회적이었으며, 부모와 관계가 더 좋지 않았고, 자식이나 가족에게 가정 폭력을 행세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는 거다.
다만 이것은 무작위로 선출된 샘플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어서 상관관계 이상의 인과관계를 밝혀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상황을 만들어 보았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가져다 놓고, 아이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말라고 경고한 후, 어른이 빠져나간 후 아이의 행동을 관찰해 본 것.
그가 아이들에게 한 “경고”는 두 가지 종류였다. “핸드폰을 빼앗겠다”거나 “컴퓨터 시간을 없애버 리겠다”는 식의 과격한 협박을 들은 아이들이 있었고, “만약 네가 몰래 이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면 난 약간 짜증날거야(a little bit annoyed)”라는 점잖고 약한 경고를 들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맞기 싫어서 말 듣는 아이들의 양산
두 경우 모두에서 대개의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 허무하다! 그러나 윌슨 교수는 당황하지 않고, 3주 후에 같은 아이들을 다른 실험에 참여시켰다.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전자 볼링 게임을 하게 하고, 특정 점수가 넘으면 상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다만 연구진이 직접 점수를 확인하지 않고 아이들이 직접 신고하게 했다. 어른이 나간 후 아이들은 혼자 볼링을 했다.
그리고 연구진은 상품을 얻을 수 있는 점수 직전에 아이를 불러 게임을 끝내버린다. 즉 처음부터 상품따위 얻을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_- 교수는 아이들이 과연 점수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고하는지 채점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3주 전에 협박을 당한 아이들은 많은 경우 거짓으로 보고하여 상을 타 갔고, 점잖은 경고를 받은 아이들은 대개 정직하게 점수를 보고했다. 윌슨 교수는 실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상이나 벌이 강할 경우 아이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게 될까? 강력한 제제가 무서워서, 혹은 거대한 보상이 탐나서 어떤 행동을 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제제나 보상이 약하다면 어떨까?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그 보상이나 벌칙으로 돌리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아이는 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원래 자신이 그 행동을 좋아한다고 믿게 되거나, 원래 자신이 그런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것. 한번 이렇게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규정하게 되면 이후에 아이는 시키지 않아도 좋은 행동을 하게 된다.
윌슨 교수의 장난감 실험에서, 협박을 들은 아이들은 자신이 장난감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를 연구진이 한 과격한 위협 때문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젊잖은 경고를 들은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른 이유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원래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라서’ 라던가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서’ 같은 이유들을.
평생 아이에게 상벌을 줄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결과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듯.
사탕과 담배 때문에 전향한 건 아니야!
이런 차이는 어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설득에 관한 책들 중 단연 베스트셀러인 <설득의 심리학>에서 저자는 중국군과 북한군의 포로 대우의 차이를 비교한다. 북한군은 포로들을 혹독하게 대했고,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각종 선전용 글쓰기를 강제로 시켰다. 협박과 폭력에 진저리가 난 전쟁 포로들은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 북한에 남지 않았다.
한편 중국군은 포로들에게 나쁘지 않은 대우를 해 주었다. 공산당 선전용 글 짓기 대회 같은 것을 열면서도 사탕이나 담배 같은 사소한 상품만 걸었다.
이렇게 유하게 나오자 전쟁 포로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공산당 선전에 동조한 이유를 적의 협박, 폭력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신이 고작 사탕이나 담배에 조국을 판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없던 포로들은 대신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것을 택했던 것. 결국 많은 이들이 전향하여 중국에 공산주의자로 남는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가 본인이 쓴 책의 구매 유무를 조사해 점수에 반영하겠다고 한 것. 도덕적 논쟁보다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런 행위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그가 활용한 방법은 학생들로 하여금 책 구입의 동기를 ‘성적을 위해서’에 한정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학기가 끝나면 더 이상 이런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라는 결론을 유도한다.
“가르쳐봐야 알죠, 울화통 터지는 casino jameshallison 거”
오랫동안 한국의 교사들은 폭력이라는 채찍과 성적으로써 얻는 성공이라는 당근으로 아이들을 다스려 왔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교사를 존경하고 교사의 말을 따르는 이유를 ‘안 그러면 맞으니까’ 혹은 ‘안 그러면 내 내신점수가 깎여 내 미래가 다치니까’ 같은 외적인 동기로 돌리게 되었다.
그러니 체벌이 사라지면, 혹은 성적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지면 교사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아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체벌은 오히려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교권이라는 개념을 따를 내적 동기(선생님을 존경하니까, 등등)를 없애버린 거다.
지금은 체벌을 금지시켰다는 서구 국가들조차 과거에는 엄청나게 과격한 체벌을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실시했다. 19세기 미국이 배경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톰 소여의 모험’ 등을 보면 엄청나게 과격한 체벌의 현장이 가감 없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체벌과 성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중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2008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로랑 캉테의 영화 <클래스>는 체벌이 원천 금지된 프랑스에서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체벌로 세우던 권위를 학생과의 소통, 격려, 설득으로 대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티모시 윌슨 교수의 연구에서 한가지 교훈을 얻는다면 그것은 ‘상이나 벌이 과하면 학생의 내적 동기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학생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공부를 위한 내적 동기다. 좋은 대학, 좋은 스펙은 인생의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이 행동을 꾸준히 하도록 이끌 내적 동기를 없애버리는 상벌은 없으니만 못하다.
한국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마저도
상벌은 그 강도가 약해서 ‘난 그것 때문에 공부하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할 정도인 것이 좋다. 물론 너무 강도가 약하면 아예 행동을 하지 않을 위험이 있으니 섬세하게 상벌의 강약을 조절해 나가야 한다. 그 강도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협박이든 체벌이든, 금전적 보상이든 장미빛 미래의 약속이든, 지나치게 강해서 정작 행동하는 본인이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갈 수 있는 외적 동기를 부여하게 되면 거꾸로 내적 동기를 죽이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을 “책 안 읽는 나라”, “교권을 무시하고 공교육을 경시하는 나라”로 만든 건 교육에 대한 과열된 외적 동기인 것이다.
한국의 교육열은 과거제도가 유일한 성공의 척도였던 조선의 문화가 대학이라는 서구 문물을 만나 변질된 거다. 이런 교육 시스템은 공부의 내적 동기를 만드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배운 것만 잘 외우면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고,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일부 학자들은 외국의 연구결과를 열심히 공부하는 걸로 충분하다면 내적 동기 같은 거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기에 한국은 이미 너무 성장해 버렸다. 사회는 급변하고 수명은 늘어나, 끊임없는 자기혁신이 수반되지 않으면 한창 일을 해야 하는 시기에 노동시장에서 도태되고 만다. 이제는 교육의 목표를, ‘공부할 때 열심히 공부해서 간판을 잘 만드는’ 과거 사회의 목표에서 ‘평생 끊임없이 나아짐으로써 평생 발전하는 내적동기를 심어주는’ 목표로 바꿔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