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의 과학소설 『당신의 인생 이야기』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공 구조물은 보이저 1호다. 1977년 발사된 이 우주 탐사선은 초속 16km로 40년째 비행 중이다. 천왕성과 명왕성을 지나 지구로부터 무려 205억km 떨어진 태양계 끝 ‘은하의 길’을 홀로 가고 있다. 2025년 무렵 모든 동력이 소진되고 지구와의 통신도 끊길 것이다. 그래도 항해는 멈추지 않는다. 태양계 너머 미지의 세계로 계속 나아간다. 목적지도 없고, 미래도 알 수 없는 고독한 비행이다.
보이저 1호에는 레코드판이 하나 실려 있다. ‘골든 레코드’로 불린다. 여기에는 한국어를 비롯한 전 세계 55개 언어로 된 인사말, 피그미 족의 노래부터 베토벤 교향곡까지 지구를 대표하는 27곡의 음악, 지구와 생명의 진화를 표현한 19개의 소리(예를 들면 빗소리, 바람 소리, 동물의 울음소리, 기계 소리 등), 지구와 인류의 모습을 담은 118장의 사진이 담겨 있다.
그들은 지구의 메시지를 이해할까?
보이저 1호의 골든 레코드는 태양계 너머에 있을지 모를 외계 생명체에 보내는 지구의 메시지다. 지구인의 편지다. 어딘가에 외계 생명체가 있다고 치자. 언젠가 그들이 골든 레코드를 발견하고 여기에 담긴 소리와 사진을 봤다고 치자. 과연 그들은 지구인의 편지와 지구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외계 생명체(혹은 외계인)가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앞서 외계인을 만나도 대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외계 생명체를 다룬 SF 영화와 소설은 대부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들과 만남은 자주 폭력적이고 비극적이었으며, 가끔 동화적이고 희극적이었다. 외계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프랑켄슈타인』 이후 우리와 ‘다른’ 존재를 대하는 우리의 일관된 자세는 공포와 적개심이었다. 영화와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실은 더 잔인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백인이 원주민에게 가했던 폭력의 역사를 보라.
문제는 대화와 소통이다. 고전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지휘하는 인데버호가 지금의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해안에 좌초했다. 탐험에 나선 그들은 그곳에서 원주민과 마주친다. 쿡 선장이 어떤 동물을 가리키며 원주민에게 물었다.
저 동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원주민 가운데 한 명이 답했다.
캥구루(Kanguru)!
이때부터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 곳곳에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동물을 ‘캥거루(Kangaroo)’라고 불렀다. 사실 그때 원주민이 한 말의 뜻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였다고 한다. 물론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한다.
<네이처>에 소설 발표하는 작가
어쩌면 테드 창은 이 이야기에 힌트를 얻어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소설에도 캥거루 일화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유일한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자 영화 <컨택트. Arrival>의 원작이다.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소설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그의 명성은 잠시 접어두자. 역대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자이자 스터전상, 휴고상, 로커스상 등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되는 모든 상을 석권했다는 성찬도 잠시 잊자. 그의 소설이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인류 과학의 진화)에 실렸다는 권위도 신경 쓰지 말자. 이 소설을 읽으며 집중할 것은 오직 하나다. 과학적 상상력과 인류 문명에 관한 철학적 성찰.
많은 이들이 말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를 보고 이 책을 샀다고. 나도 그렇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테드 창이라는 이름도, 그의 소설도, 영화의 원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도 몰랐을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이 말한다. 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고. 나도 그렇다. 만약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영화 <컨택트>는 다른 영화와는 결이 다른, 조금 더 수준 높은 SF 영화 중의 하나 정도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이 작품이 ‘우리는 미래를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혹은 과거를 왜 예측하지 못하는가)’라는 물리학을 거스르는 질문을 던지고, 외계 생명체는 우리가 사용하는 표어문자나 표음문자와는 전혀 다른 ‘어의문자(語義文字)’를 사용할 수도 있고, 이처럼 언어체계가 다르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도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구에 도착한 헵타포드라고 불리는 외계인이 왜 유독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에 반응하는지, 그러한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언어학자인 루이스 박사와 함께 외계인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물리학자 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난 페르마의 원리에 대한 그들의 수학적 기술을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야. 만약 헵타포드식 변분법이 그들의 대수학보다 더 단순하다면, 우리가 물리학에 관해 소통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가 설명될지도 몰라. 그들의 수학 체계 전체가 우리 것과는 완전히 반대일 가능성도 있는 거야.
언어체계가 바뀌면 물리법칙도 바뀐다?
테드 창의 과학소설은 대화와 소통,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한 방식으로서의 언어에 천착한다. 언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시스템이자 알고리즘이다. 수학과 물리학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며, 세계의 모든 현상은 물리학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것과 전혀 다른(예를 들어 헵타포드가 구사하는) 언어체계를 사용한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지 않아도 물리학의 모든 법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거나, 물리학의 모든 법칙이 무용지물이 되거나.
게리의 말처럼 테드 창의 소설을 읽으면, 책에서 언급하는 수학적·물리적 법칙을 이해하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 된다. 하지만 욕심은 금물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는 특히 그렇다. 내가 과학책을 읽는 이유는 하나다. 좋아하는 SF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 조금 더 이기적으로 말하자면 실험과 증명은 과학자의 몫이다. 내가 할 일은 그것에서 파생한 상상력과 결과물을 즐기는 것뿐이다. 사실 그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정복의 대상으로 테드 창의 소설을 접한다면, 돌아오는 결과는 처참한 패배다. 실제 ‘이게 뭐야’라는 실망스럽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대신 즐거움의 대상으로 테드 창의 소설과 마주한다면,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이런 소설은 처음이야’라는 반응도 적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다. 지적 즐거움은 덤이다.
책에 수록된 다른 단편소설도 놀라운 질문을 던진다. 다시 강조하건대 답을 찾으려 애쓰지 말자. 그런 질문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다. 탑을 쌓아 하늘의 천장에 닿는다면?(바빌론의 탑), 인간의 지능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다면?(이해), 겨우 77개의 단어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면?(일흔두 글자)
질문이 너무 황당하다고? 보이저호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금의 속도를 유지하더라도 보이저호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별(항성)을 만나는 것은 4만 년 후에나 가능하다. 초속 16km로 비행하는데도 그렇다. 그렇게 우주는 넓다. 30cm 크기의 골든 레코드 수명은 10억 년이다. 그토록 넓은 공간과 그렇게 오랜 시간은 테드 창의 질문과 상상력조차 시시하게 만든다. 우린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책을 덮으며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다. 영화 <컨택트 Arrival>를 다시 봐야겠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뿐이었다.
원문: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