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비 온다’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풍경이 국적마다 심히 다를 수 있겠다는 것이다. 런던에서 내리는 비는 너무… 적었다. 양도 양이지만 존재감이. 사람들이 웬만한 비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 오죽하면 ‘런던에서 비가 많이 내리는 이유는 관심받고 싶어서가 아닐까’라고 상상했다.
런더너(Londoner)들은 비가 오든 말든 거리의 몇몇이 무심하게 자신의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 말고는 리액션이 없었다. 그 무심함이 재밌어서 혼자 우산을 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2016년 2월 어느 일 아침 7시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자 런던 템즈 강 다리 한가운데 한국인 여자애 하나가 우산을 폈다 주위를 살피고 접는다. 출근 시간이라 다리 위가 북적인다. 비가 와도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비 오는 날 강 위의 다리라니, 험악하게 들리겠지만 여기는 꽤나 평화롭다.
한강을 보며 자랐던 내겐 템즈 강도, 그 위의 다리도 생각보다 매우 아담하다. 매일 아침 런던 사람들은 템즈 강 다리를 ‘걸어’ 강남으로, 북으로 출근한다. 보기 전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풍경. 그래도 다리 위인지라 바람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 옷자락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격렬히 펄럭인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머리 위로 보이는 거대한 시계탑 빅벤이 런던의 꾸중충한 하늘의 배경과 꽤 잘 어울린다. 영화 해리포터 어느 시리즈 인트로 같다.
런던에서의 7일 동안 나는 템즈 강 바로 남쪽에 붙어있는 워털루wataloo역 근처에 묵었다. 서울로 치면 용산역 느낌의 거대한 환승역이라, 아침이면 출근 인파로 역 근처부터 템즈 강 다리 위까지 북적인다. 나는 괜스레 매일 아침이면 그 인파 속에 스윽 섞이곤 했다. 이 시간만큼은 런던의 일상 풍경 속에 나라는 사람이 꽤 자연스러웠다. 가방도 여행용이 아니라 평소 같으면 소매치기 무서워 절대 들지 못할 빈약한 에코백 하나만 들고 마치 거주민인 척, 관객 없는 연기를 선보였다.
도시의 철저한 이방인인 나지만 바쁜 출근길엔 아무도 자신들과 같은 템포로 바삐 걷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여자애를 신경 쓰지 않는다. ‘도시의 이방인’이라는 그 여행객의 숙명적 외로움에서 해방되는 느낌에다가, 이 수많은 사람 중 나만 출근 안 해도 된다는ㅎ 약간은 악랄한 우월감까지 더 해져 일찍 일어나는 수고를 감내하고 매일 출근 인파와 함께 걸었다.
게다가 이 시간은 몰래 런던 사람들을 관찰하던 나에게 최적의 시간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일상 속 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표정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관광객이나 손님에게 으레 던지는 그 미소 말고 실제 그들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혼자 해리포터 투명망토를 쓰고 밖을 구경하듯, 여행자의 신분을 숨기고 런던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말처럼 한국에서도 종종 보던 표정도 보였다. 음, 예를 들어,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어떤 차를 기다리는 학부모의 얼굴에는 만국 공통 잠에서 덜 깬듯한 피곤과 약간의 동동거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배웅하기 위한 미소가 얹혔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히 런던 사람들만이 만들어내는 인상들이 있더라.
유럽 가기 전에 본 런던 후기 중 ‘런던 사람들이 친절해서’ 그 도시가 좋다는 얘기가 많았다. 해외 배낭여행이 처음인 나는 그런 후기는 통 믿음이 안 갔다. 런던에 아는 사람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웬 사람 때문에? 날씨도, 물가도, 음식도 별로라는 여행지가 사람 때문에 좋다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자꾸 접하니 어느새 묘한 오기가 났는지, 유럽 여행 첫 여행지로 런던행 표를 끊었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지. 그래서 경유 시간 포함 장장 19시간 걸려 날고 날아가 보았다.
확인 결과 런던은, 그 괴로운 비행시간의 여독이 사르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진짜 사람이 좋아 좋은 도시였다. 마주하는 런던 사람마다 그들이 이루어내는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변덕스러운 날씨, 기함을 금치 못할 물가, 좀 용서 안 될 뻔한 악명 높은 음식 맛 따위별 대수가 아니게 되었다. 타국의 낯선 도시에 실제로 두발 닿고 나서야 깨달았다. 도시의 풍경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구나.
런던은, 먼 타국에서 만나는 현지인의 매너 하나하나가 여행자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깨닫게 해 준 곳이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선 날이었다
템즈 강가의 거대한 현대 미술관인데 붉은 벽돌로 된 공장을 개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 시간을 떠돌다 바로 미술관으로 돌진한 터라 도착했을 때는 오픈 전이었다. 젠장. 시간을 때우려고 테이트 모던 뒤 한 채광 좋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전면 유리창에 테이트 모던의 붉은 벽돌이 가득 찼다.
한산한 밖과 달리 카페 안은 출근길 카페인을 수혈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 번잡스러웠다. 영국식으로 ‘플랏와이트’라고 발음해야 소통할 수 있었던 플랫화이트를 시키고 한참 후에야 음료가 나왔다. 카페의 소란에 약간 영혼이 나간 채 컵 뚜껑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데, 놓여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방금 내 바로 앞사람이 마지막 남은 하나를 가져간 듯했다. 젠장. 속으로 젠장을 외치는 내 옆을 직원 한 명이 바삐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시끄러운 카페에서 큰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울 깡이 아직 초보 여행자에겐 없다. 그리고 아직 컵 뚜껑이란 단어가 뭔지 생각도 안 난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던 한 2초의 찰나였을까. 마지막 컵 뚜껑을 가져갔던 내 앞사람이 웬일인지 다시 돌아온다. 그러고는 잠시 굳은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큰 소리로 대신 직원을 부른다. 직역해보면 ‘여기 컵 뚜껑이 없으니, 이 사람을 위해 채워달라’ 고 말한다. 약간 벙쪄 쳐다보니 눈을 마주쳐 인사하듯 생긋 웃고 떠난다.
아직 이 공간이 어색해 보이는 동양 여자애가 빈 컵 뚜껑자리 앞에서 멍 때리는 걸 지켜보고 측은히 여기시어 친히 다시 돌아와 준 듯. 유럽 여행 3일째였을까. 모든 게 낯설기만 한 초보 배낭여행자인 나는 그녀의 미소에 경직됐던 몸과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 난다. 순간 그녀의,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금발, 딱 떨어지는 검정 가죽 재킷을 입었던 이름 모를 런던 언니예쁘면 다 언니의 친절이 마음속 깊이 다가와 박혔다. 와, 낯선 이의 이 작은 친절이 이토록 감동스러울 수 있나.
다음은 런던 지하철 안. 정확히 말해 일요일마다 열리는 쇼디치 지역 플리마켓 행 지하철 안이다. 숙소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도착까지 10분 정도 남았을 때쯤, 한 역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힐 그쯤, 방금 내렸던 어떤 여자가 다시 급히 뛰어들어온다. 그러고는 내 팔을 잡고는 “어서 내려야 된다!” 며 소리친다. 뭐지 이 재난영화 같은 순간은.
얼떨결에 따라 내렸다. 알고 보니 런던 지하철은 주말마다 파업이 잦다고 한다. 그때마다 운행하지 않는 구간이 종종 생기는데, 그럼 지하철은 파업 구간 전역까지만 운행하고 U턴해서 원래 왔던 길을 돌아가게 된다. 여자가 날 내리게 했던 그 역이 바로 U턴 지점이었던 것. 그녀의 눈에 나는 딱 봐도 이 시간에 쇼디치 플리마켓을 가는 관광객일 턴데, U턴 지점에서 멍 때리고 안 내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본인은 내렸다가 지하철 문닫히는 그 아슬-한 순간 다시 뛰어들어와 나를 끌어 내린 것이다.
잡혀 따라 내리긴 했지만 상황 파악 못 하고 얼떨떨한 사이, 언니께서는 나에게 대충 상황 설명해주고는 눈인사를 남기고 뿌듯해 보이는 뒷모습을 남기며 총총 사라졌다. 그녀 아니었으면 거진 1시간 걸려 온 거리를 혼란에 가득 차 U턴해갔으려나 나는.
런던 여행 후 반년이 지났다. 지금 내게 가장 강렬히 남은 런던의 잔상들을 꼽으니 이렇다. 솔직히 써놓고 보니 심히 소소하다. 여행 전 계획 목록에는 전혀 없던 일들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놀러 온 관광객에게 자연스럽게 베풀 수 있는 행동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이 외에도 무수히 작은 친절들을 겪었는데, 어떤 얼굴, 어떤 일들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호의들이 어려있던 여러 익명의 얼굴들이 모여, 도시 런던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이룬다. 나에게 그게 꽤나 강렬했는지, 고작 런던에 일주일 머물렀던 주제에 이후 느낌만으로 ‘어, 저 사람 런던 사람 같다’하고 구별하게 되었다. 이목구비를 구별하는 게 아니라, 런던 사람에게 풍기는 런던 특유의 느낌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달까.
이토록 사람 좋았던 런던인지라 누군가 이번 유럽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뭐냐고 물으면 난 ‘런던에서 핸드폰 잃어버렸던 것’라고 대답한다. 반어법인 줄 알고 상대방은 피식 웃지만 진심이다. 사실 런던 여행 마지막 날 나는 쇼디치 지역 플리마켓에서 나의 소중한 아이폰ㅠ을소매치기 당했다. 하지만 이날 하루 동안 런던 사람들의 엄청난 호의와 친절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때 이후로 ‘사람’을 많이 좋아하게 될 정도로 인생에서 있어 아주 아주 소중한 날이었다.
글이 길어지니 언젠가를 기약하며 이야기를 접는다. 어쨌든 지금 내가 ‘런던’이란 도시를 떠올릴 때마다 내 뇌에 바로 치고 들어오는 어떤 것은 이렇게 따뜻한 런던 사람들을 마주했던 순간의 그 미소, 그 친절, 그 분위기, 그 무언가라는 것. 이 글에 결국 배어 나올 정도로 강력하게.
사족
흥미로운 것은 런던 사람들도 나에게 ‘너 한국사람이지? 한국사람은 좀 다르더라’라는 말을 종종 했다는 것이다. 난 유럽 가면 ‘니하오’, ‘곤니치와’만 듣는 건 줄 알았는데.
그들이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엄청난 소수일 텐데 불구하고, 어쨌든 무의식 중으로 한국의 배낭여행자들이 유럽에 가서 남기고 오는 잔상들이 있다는 생각.
원문: 김연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