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칼 융이 주창한 개념으로, 한 인격의 여러 측면 중 계발되지 않아 ‘열등한(의식적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 상태로 무의식에 잠자고 있는 면을 가리킨다.
이것은 흔히 누르거나 피해야 할 어둡고 나쁜 무언가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자기 그림자에 대한 의식의 거부반응이지 사실 그림자 자체는 수용하고 통합해서 창조적으로 활용할 내적 자원이다.
국내 융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씨의 저서 『그림자』의 몇몇 발췌 부분을 통해 그림자의 정의와 특징, 그리고 알아보는 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p.41)
그림자는 일차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 자아 콤플렉스의 무의식면의 여러 가지 열등한 성격경향이다.(중략) 그림자는 의식에 가까이 있으면서 자아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모르고 있는 인격부분을 깨달아가면서 성숙해가는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무의식의 요소이다. 그것은 성숙한 마음에 이른 첫 관문에 버티고 있는 수문장이다(p.52)
어떤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공연히, 알 수 없는 거북한 느낌, 불편한 감정, 혐오감, 경멸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분명 그곳에는 무의식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고 대개 그 내용은 자아의 그림자에 해당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그 사람에 대한 말이 나오면 공연히 기분이 언짢아진다든가 그 또는 그녀에 관한 좋지 않은 평을 꼭 한마디 하고 지나가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할 경우, 여기에도 그림자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p.92)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A가 생각하는 자신은 차분하고, 교양있고, 혼자 사색하는 것을 즐기며 다른 이들과 요란스럽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릴없이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보내는 무익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이들과는 어울리고 싶지도 않고, 어쩐지 한심하게 느껴진다.
의식에 드러내어 쓰고 있는 면은 위와 같으나, A씨가 무의식에 열등한 상태로 처박아 놓고 문을 걸어 잠근 면은 무엇일까? 부정적인 표현과 함께 묘사된 저런 측면-어울리고 수다 떠는-이 이 사람의 그림자다.
그걸 나쁘게 보는 것은 본인의 그림자이기에 그렇고, 판단을 거두면 저건 그냥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사교적인 측면이라 묘사할 수 있다. 물론 뒷담화나 비교하는 대화를 주제로 삼는다면 피곤하고 무익하겠지만, 모든 이가 그러는 것도 아님에도 A는 어울려 노는 이들을 뭉뚱그려 그렇게 생각한다.
특정 집단 혹은 특징을 가진 이들에게 그림자를 투사하여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로는, A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가볍게 교류하면서도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편한 사교의 영역을 원하는 욕구가 있을 수 있다. 본인이 어떤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어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끼지 못하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괜한 경계를 긋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림자의 작용이다.
그림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것, 반대로 싫다고 여기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가치관이나 성격, 취향, 성향이란 이름 아래 정의되는 많은 개인적 특징은 그 반대되는 속성의 것을 그림자로 취한다.
그림자를 인정하고 통합하는 것이 자기 성장의 첫걸음이지만, 대부분은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하거나, 인정한다 하더라도 옳다/그르다의 프레임에 갇혀 내가 옳은 이유를 열거하며 그림자가 내 것이 아님을 부인하기 바쁘다. 그것은 그림자를 더 크게 키우는 일이다. 꼭 이래야 하고, 절대로 저건 안된다-는 식의 배타성 또한 그림자가 작용 중인 측면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부모의 면면을 카피한다는 뜻이다. 이게 교육적 측면에서 부모가 모범을 보이면 아이가 모방한다는 뜻으로, 부모가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달된다고만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이가 카피하는 것은 부모가 겉으로 드러낸 것만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무의식-그림자까지 카피한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 그림자를 통한 자기 성장에 무디면, 아이 역시 부모의 모습 그대로를 닮아 자기만의 그림자를 키우고 편협한 시야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부모 입장에서는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식이 더 편하고, 기특하게 여겨질 수 있다. 나는 자유분방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들을 은연중에 싫어하는데 사춘기 딸이 그러고 다닌다거나, 수다스럽고 산만한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내 아들이 산만하고 정신없다면?
내가 공부를 잘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했는데, 혹은 공부를 못한 컴플렉스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것이 지상과제인 양 여겨지는데 내 아이가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다면?
아이가 가진 어떤 특성 자체는 판단 받을 무언가가 아님에도, 부모는 자기 그림자(무의식적 욕망)로 인해 아이의 특성에 멋대로 기대하고 기뻐하고 실망한다. 그리고 아이를 잡기 시작하며 어떻게든 이를 자기 욕망에 맞추어 재단할 방법을 찾는다. 겉으로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 자체가 숨기고 있는 그림자는 아이를 내 판단으로 재단하여 나에게 만족스러우면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겠다는 마음이다.
아이는 그걸 귀신같이 카피해서, 사춘기 정도 되면 역으로 부모를 판단한다. 내 부모의 흠이 보이고, 나 역시 부모를 판단하여 내 호오와 편의를 기준으로 인정하거나 거부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춘기엔 부모-자식이 갈등을 겪는다. 그 시기에 안 겪으면 성인 이후에 겪는다. 부모가 기가 세면 아이는 좀 더 머리를 키우고 자기 힘을 키운 후에 반발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서적 독립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한 생명을 길러내는 성인으로서, 개인의 자기 성장을 위해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이를 인정하여 성숙한 통합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양육에도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에게 다소 강한 호오가 있다면, 꼭 이래야 한다는 지침이나 자기 상이 있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욕구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수용적인 태도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아이에게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스스로 못하는 것은 아이에게도 못한다. 암만 책을 보고 강의를 들어도 실전에 가면 말짱 도루묵인 이유다. 내가 날 인정하지 못하고 나 자신을 계속 판단하고 분별하는데 어찌 나 아닌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을 내 욕구만 채워도 괜찮다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슬로건으로 이용할 게 아니라, 내가 날 온전히 사랑해야 아이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참뜻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내 무의식에 억눌린 그림자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있으며, 이는 더 폭넓게 나 자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아이에게 보다 성숙한 롤모델로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원문: 율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