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늘 끝이 존재한다. 나는 여행 계획을 짤 때, 여행 마지막 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따로 일정을 잡지 않고 비워둔다. 여기서 마지막 날은 비행기를 타는 날이 아니다. 오롯이 하루를 다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인 비행기 타기 전날을 말한다. 그날은 꼭 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꼭 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또다시 가보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가는 현지 마트에 가는 것이다.
한 달여간의 유럽 여행의 마무리이자 바르셀로나 일정의 마지막 날은 새벽 일찍부터 서둘렀다. 구엘 공원에서 해가 뜨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틀 전, 가우디 투어를 하며 바르셀로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가우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도시가 바르셀로나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우르르 단체로 다니는 현지 데이 투어의 특성상, 좀 더 여유롭고 세심하게 둘러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시장 바닥 못지않은 북적임 때문에 전 세계의 관광객들과 어깨싸움해야 했던 피곤함이 가득했었다. 이 아름다운 곳을 오롯이 나의 시선으로 집중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일행들과 의기투합해 마지막 날 아침은 구엘 공원에서 일출을 보자고 약속했다. 동양에서 온 가난한 여행자들에게 아침 8시 전에 입장하면 유료 구역까지 전부 무료로 볼 수 있는 메리트도 분명 한몫했다.
짙은 어둠을 뚫고 4명의 여자는 구엘 공원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동네 공원에서 아침 운동을 하는 주민들을 제외하고 관광객은 몇 팀 없었다. 우리가 동네 뒷산 가서 나무에 등치기를 하는 것처럼, 동네에 공원이 있어 가벼운 차림으로 와서 조깅을 하고, 개 산책을 시키는 흔한 풍경. 하지만 그 공원이 세계적인 관광지인 구엘 공원인 거다.
빈속에 헉헉거리며 가파른 경사를 올라 구엘 공원의 일출 명당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일지도 모르는 벤치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앗, 이럴 수가. 현지의 방송팀인지 광고팀인지 촬영 무리가 선점하고 있다.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자 제지한다. 대충 설명하는 걸 들으니 해 뜨는 걸 찍기 위해 사전에 공원 측에 촬영 허가를 받았으므로 너희는 여기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다. 걸쭉한 한국 욕이 명치부터 차올랐지만, 애써 꾹꾹 눌렀다. 원하는 중심의 위치는 아니지만 사이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말고도 몇몇 관광객들이 우리와 같은 어택을 받고 사이드로 물러났다. 그런데 조금 늦게 온 중국인들은 제지를 당했지만 그들이 뭐라고 하든 당당히 들어가 사진 한방을 찍고 나온다.
계획은 살짝 어긋났지만 촬영팀이 예상한 시간보다 빨리 빠지는 덕분에 우린 다시 자리를 잡고 구엘공원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바르셀로나의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의 소음도, 어깨싸움도 없는 오롯한 우리만의 시간…. 줄을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구엘 공원의 마스코트 도마뱀 분수도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하나 뜯어볼 수 있을 만큼 여유롭게 감상했다. 그 아침에 가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구엘 공원의 진면목… 우리는 두고두고 그때의 감동을 얘기하고 있다. 그 아침의 감동 하나로 바르셀로나 여행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구엘 공원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와 근처의 작은 카페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지하철역 앞의 김밥 천국처럼 간단히 커피와 빵을 먹고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아침을 해결했다. 다음 행선지인 마트가 문 열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지인의 삶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는 이유로 현지의 유명 시장을 가곤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가는 이름난 시장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한국 사람들이 남대문이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찍어낸 듯한 기념품을 파는 시장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지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느끼고, 현지 색이 물씬 느껴지는 기념품을 살 수 있다는 기대는 애초에 접는 게 좋다. 물론 전부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중국 공장에서 찍어낸 세계 어디에서도 살 수 있는 물건들과 현지 물정 모르는 관광객의 지갑을 노리는 얄팍한 장사꾼들이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그저,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나는 흥정의 피곤함, 바가지의 위험, 소매치기의 습격 등을 피해 차라리 현지의 평범한 서민들이 일상용품을 사는 동네 마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명품쇼핑보다 현지의 식재료 구경이 더 즐거운 나 같은 성향의 소유자들은 더없이 즐거운 놀이터다.
오픈 시간에 맞춰 메르까도나(스페인의 대표 대형 마트)에도착하니 작은 주머니 카트를 들고 온 동네 아주머니들 줄을 서 있다. 우리도 그 아주머니들을 뒤따라 줄을 섰다.
이제 막 오픈한 마트는 싱싱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스페인 여행 내내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 두었던 이름들을 찾아 마트를 휘져었다. 비싸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 소금, 후추, 소스, 올리브 오일 등등이었다. 국민 과자라 불리는 초코칩과 스페인에서 인상 깊었던 간식, 추로스를 찍어 먹는 초콜릿 소스를 만드는 가루도 샀다. 빠에야를 만드는 키트도 고르고 스페인을 다녀오는 관광객들이 꼭 산다는 꿀 국화차도 카트에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맥주도 몇 캔 넣어가고 싶지만 이미 내 캐리어는 기준 무게를 넘을 거 같아 포기했다.
언제라도 스페인의 날들이 그리워질 때, 눈으로, 코로, 입으로 느낄 수 있는 먹거리들을 쟁여 왔다. 그렇고 그런 메이드 인 차이나 조악한 기념품을 사는 것보다, 나에겐 더 의미 있는 기념품이다.
어쩌면 여행의 마지막 날이 인생의 마지막 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웠던 곳에 다시 가보고, 살았던 날들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만의 기념품을 간직하고… 그렇게 이번 생을 마무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이번 생을 잘 여행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날, 그렇게 여한 없이 미련 없이 돌아갈 수 있다면 아마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