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을 겨울의 시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어느덧 겨울은 지척에 서 있다. 차가운 바람은 옷을 겹겹이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의 빈 구멍을 찾아서 몸속 깊숙이 들어온다. 문밖을 나서면 기다린 듯 반갑게 맞는 바람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고, 이제는 이불 밖을 나가는 것도 꽤 큰 결심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집에서 뒹굴 거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늘어난다.
수많은 포털 사이트를 돌아다니던 와중에 나는 귀여운 일러스트로 그려진 ‘염리동 소금언덕 지도’를 보았고, 평소 관심을 두었던 독립 출판물 여행책방 ‘일단멈춤’에서 지도를 배부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지도가 탐이 난 것인지, 아니면 더 추워지기 전에 마지막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 조금은 헷갈리기는 했지만 집 밖으로 나갈 결심이 마음속에서 불쑥 솟아났다. 그제서야 오랜 시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몇 겹의 두꺼운 이불들을 박차고 일어나 서랍에 놓인 카메라를 꺼내 들고 염리동으로 향했다.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 염리동
이름의 어감이 특이하여 약간의 조사를 해 보니 ‘염리동鹽理洞’ 은 한자 뜻 그대로 ‘소금 마을’이라는 뜻으로, 과거에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 염리동은 이대역 바로 근처에 위치한 동네이지만 나에게는 생소한 곳이었다. 이대역을 가게 될 때면 주변 번화가만을 배회하며 북적이는 인파에 에너지를 탕진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른 곳으로 눈 돌릴 새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곧장 지하철을 타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곳에 이렇듯 독특한 동네를 두고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나의 둔감함을 실감했다.
이대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를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염리동은 좁고 가파른 길의 연속이었다. 서점 ‘일단 멈춤’을 찾아가는 도중 보았던 낡은 간판들과 나이 지긋하신 노인분들은 그 자체로 염리동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와도 같았다. 20대와 관광객들로 항상 활기가 넘치는 이대 입구에서 얼마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이토록 조용하고도 허름한 마을이 있다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일단 문 앞에서 멈추고, 문 안에서 한 번 더 멈춰주세요
독립출판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방이 요즘 인기라는 것은 SNS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속도와의 싸움이 빈번해진 사회 흐름 속에서 차 한잔 앞에 두고 책을 읽는 여유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 고맙고도 즐거운 일이다. 동네 구석구석에 위치한 책방들은 항상 그 자리에서 여유에 목마른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점과 책방은 분명 동의어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출판물을 판매하고 발간하는 곳만큼은 ‘서점’이 아닌 ‘책방’이라는 정감 있는 단어로 부르고 싶어진다.
염리동에 위치한 여행책방 ‘일단 멈춤’은 지난해 11월경에 오픈한 이래로 이제 막 1년이 된 책방이다. 여행을 주된 테마로 하며 독립출판물과 여행소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출입문 옆에 놓인 일광욕 하던 식물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후의 따사로움을 한껏 머금은 채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는 식물의 모습에서 ‘일단 멈춤’이 어떤 느낌의 책방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서점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분을 비롯한 세 사람이 어떤 프로젝트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조용히 한켠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마음에 드는 사진집을 발견하였다. 파스텔 분홍 표지에 필름 카메라로 찍은 듯이 보이는 사진이 삽입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풍경을 바라보며 서있는 한 커플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 사진집은 작가의 리스본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을 모아두었고, 그 매력에 빠져 결국 집까지 데려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내가 방을 나오게끔 만들었던 소금언덕 지도를 발견하였다. 생각보다는 작은 크기였지만 알찬 내용이 담겨있었다. 계산을 하면서 주인분에게 소금언덕의 명소를 몇 곳 알려달라고 하자 자세한 설명과 함께 보라색 형광펜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주었다. 염리동에 대한 애정이 설명 속에서 느껴졌다.
노란색으로 물든 소금 언덕은 지금…
염리동의 전봇대에는 노란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그 위에는 네모난 회색 상자에 길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사실 지형적으로 길이 좁고 언덕길이 많은 염리동은 범죄 발생률이 높았던 동네였고, 2012년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 디자인정책 팀을 비롯한 약 10명의 전문가들이 모여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다양한 방안 중 하나로 염리동 골목 바닥에 칠해진 주황색의 작은 정사각형들은 복잡한 골목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염리동 소금언덕이 많은 벽화마을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점이 있다면 길 중간마다 들어서 있는 작은 규모의 특색 있는 상점들일 것이다. 염리동은 과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옛 상점 간판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한 지역적 특성을 살려 책방 ‘일단 멈춤‘과 식당 ‘언뜻 가게’는 함께 지도를 완성시켰다.
지도에 보라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을 위주로 돌아보기로 하였고 먼저 ‘혼자 혹은 둘이서 길’로 출발하였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분홍색으로 칠해진 좁은 벽화 길이 등장했다. 낮 시간대에도 꽤나 적막했기 때문에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곧이어 만난 장소는 물물교환 길로 마을 주민들이 쓰지 않는 물건을 길에 내놓으면 가져간다고 한다. 아쉽게도 염리동 지킴이의 집 옆에만 20개 정도의 그릇들과 그림이 놓여있어 물물교환 ‘길’로 칭해지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염리동 랜드마크 ‘태양문구’, ‘언뜻 가게’, ‘식물성’은 소박한 동네와 친절한 주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지도의 설명이 부족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염리동 길이 워낙 복잡하게 나 있다 보니 ‘언뜻 가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길에 그려진 벽화들과 바닥에 그려진 사방치기를 비롯한 게임 지도는 찾아가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SNS에 염리동 골목길 사진을 한 장 올렸는데 다시 가고 싶냐는 댓글이 달렸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당연히!’이다. 아직 지도에 표시된 곳들을 모두 가보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있고, 책방 ‘일단 멈춤’에서 구매한 사진집이 월간집이었기 때문에 사진집의 이후 시리즈가 궁금해서라도 꾸준히 방문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약간은 낡은 듯 사람 냄새가 가득한 염리동에서 나는 다시금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