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잘 쉬기란 참 쉽지 않다. 어려운 건 아닌데,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 ‘쉽지 않다’. 카페에 가면 스피커 위치를 먼저 살피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에 가도 옆 테이블에서 너무 크거나 듣기 불편한 소리가 들리면 오히려 스트레스만 받고 나온다. 사람 별로 없고, 드문드문 연 가게에서 정리하는 시간 갖기가 편해 주말에는 종종 여의도나 상암동에 간다. 내가 일하지 않는 동네니까 가능한 일.
일요일에는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는 일본 영화감독 ‘나카히라 코우 회고전’에 다녀왔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 그에게 보낸 찬사가 그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찾아보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조연출 출신이라는 이력도 흥미를 더했다.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많이 본 것도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영화를 전공한 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돈도 많이 들고 상대적으로 놓치는 기회비용도 발생할 수밖에 없으나 깊이 있게 영화 즐기는 방법을 접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다. 새로운 영화도 좋지만 오래된 필름의 맛을 즐기기 좋아한다. 그런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어렸을 때 이런저런 영화를 많이 봐서다.
어린 시절 봤던 영화를 다시 보면 같은 영화인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에 마음이 간다거나 전혀 다른 영화로 해석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내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발견하게 된다. 레오 까락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다시 보며 이런 취미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198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거의 알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 이야기로 다가왔다. 그래도 그냥 좋았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당시 영화를 만든 레오 까락스 보다 더 나이를 먹고 이 영화를 보니 ‘사랑의 지난함에서 오는 피로’에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레오 까락스, 드니 라방, 이 영화 모두 ‘그래도’ 좋아한다.
일요일에 본 영화는 〈소용돌이〉. 같은 제목의 일본영화가 있는데다 유명한 작품은 아니라 관람 기회도 드물고 자료도 별로 없다. 다만 오랜만에 몰입해서 본 영화였고 보고난 후 힘이 쭉 빠졌다. 분명 영화를 봤는데 감독이랑 단둘이 술 마신 기분이다. 영화를 보고 떠오른 책은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떠오른 또 다른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아이즈 와이드 셧〉… 즉 결혼 후, 남과 여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
결혼이란 무엇일까? 세상 똑똑한 사람들이 결혼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이게 과연 필요한 제도인가?’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도 종종 한다. 영화 〈소용돌이〉를 보고 난 후에도 비슷한 단상이 스쳤다. 아래 영화 내용은 한국영상자료원 웹사이트의 작품 소개인데, 영화를 보고 다시 읽으니 미묘하게 영화와 틀린 내용이 있어 살짝 고쳤다.
중국 대련에서 영문학자 케이키치(남편)와 스가코(아내)는 결혼한다. 5년 뒤, 케이키치의 친구 타도코로가 부부를 방문하고, 매사에 무관심하던 스가코가 자신의 친구를 유혹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듣게 되며(친구라는 자가 한다는 말이 “네 부인이 너를 사랑하니? 음 아니야 나한테 장난 친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뭐 이런 뉘앙스) 케이키치는 충격에 휩싸인다.
이후, 전쟁에서 일본군이 패하며 이들은 피난길에 오르고 스가코는 집에서 요릿집(선술집)을 운영하며, 남자 손님과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케이키치는 2층에 갇혀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번역하며 이런 아내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관찰하고, 혼자 분노하고, 여러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 다른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로 삶의 만족을 얻는 여자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남자의 지리멸렬한 모습이 그려진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결혼하고 나서 싸우다 보면 이혼을 말할 때가 있다. 양가 부모님이 아시면 뒤로 쓰러질 이야기일지 모르나, 다툼의 과정 속에서 ‘결혼은 했으나 아직 피가 끓는 두 영혼이 내뱉을 수 있는 아무 말 대잔치의 향연’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혼인 서약은 완전히 새롭게 쓰일 것이다. 제단에 서서 부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후에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행위가 우리 인생에서 최악의 결정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공황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것도 약속합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구제불능, 우리는 정신이 나간 종입니다.”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中
작년 가을, 뉴욕 출장길에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으며 비행기에서 거의 실성한 여자처럼 웃었다. 책에는 기압이 높아 잘 나오지 않는 수성 형광펜을 꾹꾹 눌러가며 밑줄 그은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다.
이 책을 배우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차마 ‘내가 어디에 밑줄을 그었는지 알리고 싶지는 않아’서 새 책을 한 권 더 사서 선물하기도 했다. 똑같은 책이 집에 두 권 있다. 이 포스팅에 발췌된 위의 문구를 적기 전에 남편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었고, 남편은 “좀 살아본 형이 쓴 글이네”라는 말을 하며 같이 웃었다.
영화를 보고 ‘결혼이란 무엇인가?’의 답은 쉽게 못 찾았으나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 왜 나카히라 감독을 좋아했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큰 흐름에서는 예상하지 못할 이야기 전개도 아니고 엄청난 영상미도 없지만 사람의 감성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감각적으로 담아내는 연출은 ‘과연 1920년대생 감독이 1960년대에 만든 작품이 맞나?’ 생각 들 정도다. 섬세하고 자극적이다. 세련됐다. 몇몇 대사는 요즈음 나오는 영화에 쓰여도 놀랄 표현이다.
기회 된다면 나카히라 코우의 영화를 좀 더 찾아보고 싶다.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모습이 궁금해서다. 〈소용돌이〉의 주인공 스가코는 감성적으로 연약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건 그들이 남자였다는 느낌뿐”이라며 영화 내내 스스로 결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혼한 여성에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덧대어지는 출산도 없고, 전쟁 시 발현되는 여성의 본능적인 강인함도 엿볼 수 있다. 사진만 봐도 연애 참 잘할 거 같은 감독님께서 다른 욕망 가득한 연애사들을 어떻게 풀어놓았을지도 궁금하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 좋다. 나의 욕망에 충실하기에 타인의 욕망도 좀 더 이해하는 마음이 좋다. 결혼 후 남편과 싸우다 보면 우리 싸움은 ‘서로의 욕망을 감추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뢰와 의리’에 기반 두어서 그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하지만 그 완충제 덕분에 또 잘 화해하게 되는구나 싶다. 성숙한 두 어른이 만난 결혼이기보다는 아직 꿈꾸는 두 청춘이 함께 한 결혼이기에 각자의 성장통을 잘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있을 것이고.
결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각각의 부부들이 제각각 놓인 상황에 맞춰 융통성 있게 잘 살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욕망과 욕망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 틈을 잘 마련하는 마음. 동양적인 색채가 담긴 ‘똘레랑스와는 또 다른 느낌의 관용’. 어쩌면 이런 욕망의 드러남이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 나카히라 코우를 동경했던 이유 아니었을까.
원문: 김정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