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역에 내리가 그레이스 백화점 앞으로 나온나. 그레이스 백화점 끼고 올라와가 공원 사거리 있거든, 거기서 보면 형제갈비라고 큰 고기 집 있고 쭉 올라오면 독수리 다방이라고 있다. 그 사이 길로 오면 신촌 하숙이라고 간판 보일끼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의 대사를 보면 당시 신촌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다. 대학생들이 북적거리던 그 때의 신촌은 낭만이 있었다. 어른과 아이 사이, 조금 촌스러워도 풋풋한 대학생들의 모습을 닮은 거리는 신촌만의 매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90년대 대학생만의 낭만이 사라졌듯, 신촌을 대표하던 그레이스 백화점은 현대백화점이 되었고, 독수리다방은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하숙집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신촌의 급격한 변화 속에도, 그 당시의 낭만을 간직한 곳이 남아있다. 아쉬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신촌의 특별한 공간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1. 홍익문고
신촌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홍익문고는 오랫동안 신촌을 지켜왔다. 1947년에 만들어져 내년이면 60주년을 맞는 이곳은 3대째 이어져 오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대형서점에만 익숙했던 나는 홍익문고만의 잡화점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층 한 층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어릴 적 할아버지 댁의 서재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책 냄새와 책장을 넘기는 백색 소음이 마음 한 켠의 고민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홍익문고의 박세진 대표의 꿈은 4대까지 가업을 이어 홍익문고를 100년 서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과 함께 보여주신 흑백사진은 1958년의 홍익문고를 담고 있었다. 1958년 판잣집 앞의 홍익문고는 자신이 2016년까지 이어져 올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이 되고 홍익문고는 화려한 신촌의 빌딩 속에서 조금 촌스러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곳에는 대형서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가 녹아있다.
2. 미네르바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라는 수식어를 가진 미네르바는 1975년부터 신촌의 변화를 겪어 왔다. 하지만 신촌이 각종 프랜차이즈로 덮여가고 있을 때도 미네르바는 1975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식탁보와 난로, 낮은 테이블 그리고 미네르바에서만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은 나를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만들어주었다.
영화 속에서 구식 자동차가 주인공 길을 1920년대의 파리로 데려간 것 같이, 미네르바는 나를 1970년대의 신촌으로 데려다주었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서 직접 내려주는 싸이폰 커피는 70년대의 아날로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클래식 음악과 어우러지는 달그락거리는 커피잔 소리는 지금 당장 비가 쏟아졌으면 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가 성석제는 그의 작품 「쏘가리」에서 ‘그곳은 클래식 음악보다는 커피향이 더 인상적이고 커피향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커피를 끓이는 알코올램프였고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구석자리에서 눈을 감고 인상을 쓰고 있는 70년대식 낭만주의자들이었다.’라는 문장으로 미네르바를 묘사했다.
미네르바의 모든 것은 묵묵하게 1970년대의 신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미네르바에 가면 기꺼이 낭만주의자가 되고 싶어진다.
3. 우드스탁
무한도전의 토토가 열풍이 불 때, ‘밤과 음악 사이’에 가본 적이 있다. 나는 H.O.T, 핑클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 시절을 함께 하지 않았더라도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라 생각한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운영 중인 신촌의 우드스탁에서는 그러한 음악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밤 11시 즈음 들어선 우드스탁은 신해철의 <그대에게>로 인해 흥분의 도가니였다. 누군가의 신청곡으로 틀어진 노래를 모든 테이블의 사람들이 일제히 따라 부르며 즐기고 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91년도에 발표된 노래의 감성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드스탁에서 만큼은 40대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도 소년과 소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음악이 곧 시간을 거슬러 스스로의 청춘을 만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이 조금 씁쓸하게 다가왔던 것은, 내가 40대가 되었을 때는 과연 어떤 음악으로 모두가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 때문이었다. 낭만이 가득했던 90년대의 음악과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지금의 후크송 중에서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20년 후에 과연 후크송이 나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음을 가진 나를 40대가 부러워한다지만 우드스탁에서 만큼은 본인의 청춘을 추억할 수 있는 음악을 가진 그들이 부러웠다.
4. 독수리다방
독수리다방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메모 게시판’이다. 메모 게시판은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쉽게 연락할 수 없었던 1970년대에 만남을 약속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락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서로를 향한 쪽지를 남기던 독수리다방은 신촌의 대표적인 소통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04년부터 약 9년간의 휴식을 가지고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독수리다방의 주인장은 소통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언더우드관과 창천교회, 그 옆의 현대식 세브란스병원과 어우러지는 동시에 옛 7080 독수리다방의 정서를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분명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의 독수리다방과 지금의 독수리다방은 확연히 다르다. 새로운 인테리어 속에 새로운 사람들이 앉아있다. 하지만 겉모습은 달라졌어도 독수리다방이라는 이름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은 긴 시간의 거리를 보다 가깝게 좁혀준다. 독수리다방의 입구에는 기형도 시인의 시가 적혀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독수리다방에 자주 왔다던 그의 시를 보면서, 수십 년 뒤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함께 눈물짓고 마음 아파한다. 어쩌면 독수리다방의 외형적인 변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월을 넘나드는 감성의 공유가 있는 한, 여전히 독수리다방은 신촌의 낭만이므로.
원문: URBANPOLY / 필자: 진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