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이 듬성듬성 켜진 어두운 거리, 셔터 내린 가게들, 무너질 듯한 박스와 철재 더미로 음산한 느낌을 풍기는 을지로의 밤. 밤거리에서 꽤 담대한 편인 나에게도 을지로의 밤은 조금 어렵고도 두려웠다. 영화 〈피에타〉의 음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로 을지로의 공구 거리가 활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기계가 돌아가는 을지로의 낮 역시도 다른 의미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철물, 공구, 금속, 조명, 타일 도기, 인쇄 등 지금까지 을지로를 지탱해온 분야들에 관련하여 나는 무지했고, 공업지구가 형성된 일제강점기 이래 대한민국 상공업의 역사와 함께 다져진 을지로만의 아우라는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었다.
연륜 있는 영세업체 사장님들만의 터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을지로는 젊은 전문가와 예술가들에게도 친근한 지역이다. 미술 전공 학생들만 해도 작품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줄기차게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주머니 사정에 적합한 낮은 임대료와 중구청의 지원까지 어우러지면서 을지로는 ‘기회의 땅’이 되었고 곧 젊은 예술가를 위시한 ‘도시재생’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낡고 쇠퇴한 이미지와는 달리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공간이 을지로에 생겨난 것이다.
지금의 을지로와 유사하게 저렴한 부동산 시세에 힘입어 홍대, 이태원 해방촌, 성수동 일대에 젊은 상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의 발길과 함께 천정부지로 치솟는 임대료로 인해 오히려 개성 있는 상점과 예술가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가 뒤따르는 문제점이 발생해왔다.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것일까? 근래 을지로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보이는 공간인 ‘신도시’ ‘호텔수선화’ ‘커피한약방’은 공통적으로 각자의 존재를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을지로 골목에 숨어 입구 즈음에 도달해서야 가게 이름이 적힌 작은 간판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고, 이마저도 못 찾는다면 주위를 뱅뱅 맴돌며 헤매는 일도 허다하다. 심지어 간판을 따라(올라)가면서도 내가 찾던 곳이 정말 여기가 맞는지 수십 번을 의심하게 된다.
을지로 골목 특유의 어둡고 낙후된 분위기는 ‘멋진 장소를 찾았다’며 친구들을 데려가던 길에도, 재차 ‘장기 팔리는 거 아니냐’ ‘우리 모르게 다단계라도 들어간 거 아니냐’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의 분위기를 풍겼다. 막상 도착하고 나면 이렇게 멋진 곳을 이제야 찾았다는 탄식과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인테리어와 감각적인 음악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데, 특히 디제잉 공연에 맞춰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신도시)은 건물 밖에서 절대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일 것이다. 지금 을지로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힙한 세 곳의 모습은 을지로의 낙후된 풍경과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들’의 정체성은 을지로와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게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PVC 소재의 형광 핑크 커튼(신도시)이나 램프 조명을 구성하기 위해 도르래에 감긴 채 테이블 위로 늘어뜨려 놓은 멀티탭(호텔수선화)이 멋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을지로’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특성과 전통적인 이미지 덕분이다.
이들은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서 유독 세련미가 돋보이지만 시공 과정에서 그대로 살려둔 페인트칠 벗겨진 벽면이나 낡은 전기계량기(커피한약방)로 미루어 볼 때 ‘을지로’만의 투박함을 그대로 닮아있다.
새롭게 변화하는 을지로의 매력은 현재와 과거의 기묘한 ‘공존’에 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인’ 모습이 을지로의 새로운 정체성이며 이는 추후 발생할지도 모를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이겨낼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몇십 년 동안 그래왔듯 을지로 골목의 노포는 변함없이 장사하고 공장의 기계들은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을지로는 과거에 정체되지 않으면서도 새로이 깃드는 문화와 감각이 기존의 공간 사이에 스며든다. 이러한 ‘상생’의 가능성이야말로 을지로의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나갈지 기대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신도시
바깥으로 비트가 흘러나오는 철문을 밀어젖히면 이름 그대로 ‘신도시’를 마주할 수 있다. 어두운 내부를 밝히는 네온사인과 몽환적이고 독특한 하우스 계열의 음악이 강렬한 첫인상을 전달한다. 분명 을지로 골목의 낡은 건물 안에 들어왔건만 실내 곳곳에 난잡하게 놓인 범상치 않은 소품이 음악 소리와 맞물려 마치 이국적인 공간에 와있는 기분이 만들어 낸다.
단순한 바(bar)를 넘어 이곳을 예술가들의 교류 공간으로 발전시키려는 ‘신도시’의 행보는 을지로를 근거지로 삼는 젊은 예술가들이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호텔수선화
을지로 인쇄 골목에 위치한 ‘호텔수선화’는 낮과 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 각각의 매력이 있는 카페 겸 바다. ‘코워크 플레이스 카페 & 바(CO+WORK PLACE CAFE AND BAR)’라는 설명에 걸맞게 디자이너들의 공동작업실로 활용되고 있으며 전시와 공연이 이루어지는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세 디자이너 각자의 취향이 반영된 3칸의 작업실은 철제프레임과 나무막대, 슬레이트 지붕, 콘크리트 벽, 자개 테이블, 동양화 액자 등으로 꾸몄다. 이처럼 수더분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호텔수선화’의 매력이다. 어둠 속에서 미러볼이 은은하게 돌아가는 화장실마저 아름다울 정도로 공간 구석구석에 섬세한 감각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커피한약방
을지로3가 빌딩 뒤편 골목에 숨은 ‘커피한약방’의 독특한 콘셉트와 분위기는 그 자체의 매력뿐 아니라 세대를 아우르는 효과까지 이끌어내며 주인장의 영리한 감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할머니 댁에서나 볼 법한 자개장을 카페 카운터와 벽면 장식 인테리어에 적극 활용한 점이 무척 참신하다. 여기에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온 앤티크 소품들이 더해져 독특한 조화를 이룬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흔히 뜨는 공간은 유행에 민감한 젊은 손님이 대부분인 것에 비해 ‘커피한약방’에는 지긋한 나잇대의 손님도 많이 보였다. 한약방이라는 콘셉트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덕분에 중년층 손님도 거부감 없이 찾는 ‘커피한약방’은 그 자체로 어제와 오늘이 어우러진 을지로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