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먼 남자는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공포를 억누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눈이 먼 남자는 초조한 마음에,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내밀어, 그가 우유의 바다라고 묘사했던 곳에서 헤엄을 치듯이 두 손을 휘저었다. 입에서는 벌써 도와 달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절망으로 넘어가려는 마지막 순간에, 눈이 먼 남자는 다른 남자의 손이 자신의 팔을 가볍게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하시오. 내가 잡았소.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1.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원인불명의 실명이 전염병으로 퍼져가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도시는 눈이 먼 자와 정안인으로 분열된다.
오후 7시, 좁은 골목길을 지나 지하철에 몸을 싣고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가기까지 나의 퇴근길은 고요하게 반복된다. 그리고 나와는 달리 날마다 다른 동선과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 집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허구의 세계가 아닌 현실 속에서 ‘불편’이라는 장벽이 세워진 시각장애인들의 도시를 그려본다.
2. 한국, 서울, 시각장애인
한국에는 25만 3천여 명, 서울에는 4만 3천여 명의 시각 장애인이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각 장애인을 자주 접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흰 지팡이와 리트리버 안내견 정도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의 전부일 것이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자면 흔히 ‘시각장애인’을 떠올릴 때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전맹을 생각하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상당수는 명암을 구분할 수 있거나 희미하게나마 색깔을 구분할 수 있고 여러 잔존 감각과 기억을 활용해 일상생활을 한다.
또한, 시각장애는 선천적 원인이 아닌 후천적 원인으로 얻은 장애 비율이 90% 정도로 훨씬 높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고령화에 따른 눈질환으로 장애를 겪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활자로만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낯선 그들의 삶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기 위해서, 나는 나의 감각을 시각장애인의 감각적 높이에 맞춘 채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3. 장한평역에서 왕십리 중앙선까지
장한평역 2번 출구에서 시각장애인 보행체험을 시작했다. 친구 집이 있어 자주 이용하던 지하철역으로 유난히 계단이 많은 곳이다. 안대를 끼고서 한 손으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대여한 지팡이를 쥐었다.
앞이 깜깜했지만 시작점을 인지하고 있어서 두렵지는 않았다. 처음 사용해보는 지팡이는 묘한 설렘을 주었고 계단 손잡이를 더듬으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계단 사이 평지에서 헛발질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잡았던 계단 손잡이가 차갑게 변하는 순간, 햇볕이 없는 실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체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손잡이가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유도 블록을 읽지도 못하는 가짜 장님인 채로 지팡이를 부지런히 두드렸지만, 거리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분주하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목소리와 구두 소리, 여러 발소리만 또렷하게 들릴 뿐이었다.
시각 장애인은 청각, 촉각, 그리고 과거에 누적된 신체적 경험을 최대한으로 살려 물체를 인지해야만 한다. 나에게 시각이 차단된 순간부터 물체의 개념은 불확실해졌고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내 눈이 멀어버린다면 집에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동행인에게는 위험한 순간이 있을 때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았고 벽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지하철 탑승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평소보다 세게 얼굴을 스쳐 갔고 나 홀로 분리된 공간을 걷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소화기 비상벨을 누를 뻔하기도 하고 갑자기 손이 푹 하고 빠져 놀라기도 했다. 증명사진 촬영 기계에 손이 들어갔다 나온 것이다.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맞추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생소한 경험이 쌓여갔다. 에스컬레이터 초입에 설치된 볼라드는 갑자기 누군가 발을 거는 듯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인식하는 장애물들이 많아질수록 나의 보폭은 작아졌고 손과 발에 닿는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동행자는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걷는 모양새가 낯설게 보인 것 같았다. 그러다 내 뒷모습을 바라본 행인이 “에휴”하는 안쓰러움이 섞인 한마디를 하고 지나갔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었다. 문득 시각장애인 또한 갑작스러운 동정과 마주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떤 어르신은 벤치에 잠깐 앉아보라며 계속 나를 불러 세웠다. 삶이 힘들지 않은지 일방적인 안부를 묻고 싶어 하셨다.
지하철을 탔다. 틈새가 신경 쓰여 큰 보폭으로 발을 내디뎠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다수의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혹여나 부딪힐까 싶어 몸을 움츠렸다. 왕십리역까지 세 정거장을 기다리는데, 어떤 역에서는 도착역 안내 방송이 들렸고 또 어떤 역에는 지하철 소음에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극도로 예민해졌다. 동행자의 팔을 잡고 있었지만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2014년 용산역에서 일어났던 시각장애인 추락사고는 미흡한 유도블록 설치 때문에 발생한 참사였다. 사고 피해자는 계단과 승강장 사이에 끊겨진 3m가량의 유도블록을 찾아 헤매다 선로로 추락해 사고를 빚었다.
시각장애인 피해자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처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으며, 피해자가 선로에 추락한 당시 역내 안전요원의 신속한 구조가 이뤄지지 않아 피해 정도는 더욱 커졌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전히 방향이 잘못 표시되었거나 무성의한 시공으로 훼손된 점자블록이 많아 시각장애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왕십리역입니다”라는 안내방송에 맞춰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지하철 시각장애인 안내 도우미’ 서비스를 받았다. 지하철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안내 도우미를 요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조끼를 입은 할아버지가 오셨다.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인 할아버지는 시각 장애인 체험 중이라는 나의 말에 연신, 팔을 쓸어주시며 기특하다는 말을 건네셨다. 그러곤 본인 팔꿈치에 내 손을 얹고 왕십리 중앙선까지 익숙하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다. 팔꿈치를 미는 것은 사람이 많으니 옆으로 가라는 몸짓 언어였고, 뒤로 팔꿈치를 빼면 본인 뒤로 서라는 의미였다.
“계단입니다”
“엘리베이터에 탑니다”
“에스컬레이터입니다”
“끝났습니다”
왕십리역은 여느 때처럼 붐볐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시끄럽게 섞여 혼란스러웠다. 할아버지의 팔꿈치를 세게 잡고서 안내를 따라 보이지 않는 길을 예상하며 걸었다. 물론,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주춤한 탓에 넘어질 뻔하였고 계단을 마주할 때마다 허공에 발을 뻗기 일쑤였다. 최종적으로 왕십리 중앙선에 도착했을 때는 답답한 마음에 잽싸게 안대를 벗었다.
실제로 뵌 웃음이 많은 할아버지는 작은 키에 인자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피곤하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뭘.” 하고 또 웃으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여정을 끝마친 듯한 피곤함이 몰려왔고 나는 팔꿈치를 내어준 할아버지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4. “제가 도와드릴까요”
자원봉사자가 시각 장애인을 보고 건네는 첫 번째 말이다. 혹자는 시각 장애인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불쑥 팔짱을 끼고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독립보행을 원하는 시각장애인 또한 있기에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 시각장애인은 동정의 대상도 시각 외의 감각이 특별하게 발달한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동정과 편견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이 아닌 확실한 배려를 배우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거리를 안내할 때는 ‘여기’ ‘저기’라는 추상적인 표현 대신 동서남북의 정확한 방향을 알려줘야 하며 등을 밀거나 옷을 잡아당기는 대신 팔꿈치를 잡도록 배려해야 한다.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때는 손잡이를 잡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
역 밖으로 나가 잠시 벤치에 앉았다. 연두색으로 물든 봄날의 나무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매일 이용했던 왕십리역은 원래, 눈 감아도 알 정도로 익숙한 장소다. 과거에도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내렸고 서너 번의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런데 눈을 감으니 누적된 경험은 사용 불가의 공허한 영역이 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되돌아온 이 길이 누군가의 출퇴근길 혹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생각에 지팡이와 안대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5. 눈뜬 자들의 도시
통로 건너편에서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흐느끼는 여자 쪽으로 다가와 두 팔을 뻗었다. 속상한 일이 생겼군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나요, 그녀는 다가오면서 물었다. 그녀의 손이 침대에 있던 두 사람의 몸에 닿았다. 물론 즉시 뒤로 물러나는 것이 분별력 있는 태도였다. 그녀의 뇌도 그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바짝 갖다 대고, 두껍고 따뜻한 담요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작년 여름, 감각 전시 『어둠 속의 대화』에서 보낸 암흑 속 100분을 되감아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로드 마스터의 목소리를 따라 미로보다 아득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오늘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의 팔꿈치에 의지해 깜깜한 세상을 다시 걸었다. 얼굴을 모르는 채로 도움을 받았던 두 분의 목소리와 팔의 온기가 든든한 위안이 되어 낯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어느 날, 도시의 어둠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서로의 무엇인가가 되어줄 수 있을까.’
푸른 하늘 아래서 각자의 처지에 상관없이 서로의 손을 내밀 수 있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