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라 하니 그곳에는 빛이 있었다. 야훼는 지구라는 신비한 행성을 7일간의 밤낮 없는 야근을 통해 만들어 냈고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땀을 닦아내며 보기에 좋았다고 씩 웃음 지었다. 사람을 만들고 땅을 만들어 낸 전지전능한 야훼이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한반도라 불리는 땅에서는 조물주의 전능함 위로 토지와 건물의 소유 가치가 군림할 것이란 사실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모든 것에 관여하는 부동산의 권능을 깨달은 건 홀로서기를 시작한 열아홉 무렵이다. 상경 직후 과외비나 소소한 푼돈 벌이를 제외하고는 부모에게 상당수 경제력을 의지하던 그때. 임대차계약서 한 장이 지닌 무게를 체감했고 월세 5만 원이 1년이면 60만 원이란 큰돈이 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되새겼다.
지금 적어가는 이 기록은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서 20대를 보낸 한 청년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활상이자 나름의 짠 내를 담은 조악한 블루스를 묘사하고 있다. 르포르타주로 적어보기에는 밑천이 부족하고 세입자 편만 들 것이 뻔하므로 옴니버스 구성으로 횡설수설 적는 방식을 택했다.
반지하와 옥탑을 오가며 1원이라도 아끼고자 했던 노력을 나는 궁상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더 넓고, 더 깔끔하고, 더 멋진 (집도 아닌) 방에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초연한 사람도 아니다. 더 나은 주거 환경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는 그저 욕망의 회로를 일시적으로 멈춰두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습하고, 더 덥고, 더 비좁은 방에 사는 수많은 또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나름의 짠 내’를 주절거릴 뿐이다. 한 평의 가치를 월세로 환산하면 20만 원에 육박하는 참 좋은 세상, 그 세상 속에서 두 주먹만으로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 본다.
“어떻게든 살아야죠. 돈을 법시다.”
2008년, 기숙사
2008년 2월, 처음 짐을 풀었던 안암학사 생활은 돌이켜보면 그래도 호시절이었다. 턱없이 낮은 재학생 수용률 덕에 입사 경쟁이 치열했던 이곳은 사실 1979년에 완공된 낡은 건물이다. 그럼에도 상경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기숙사 입사를 원했다. 교내 어디로든 이동하기 좋은 위치(어디든 공평하게 멀다), 모든 게 낯선 스무 살의 마음을 위로하는 룸메이트의 존재, 알코올과 인스턴트 음식으로 인해 얼룩지기 쉬운 새내기의 위장을 그래도 건강하게 채워주는 식당의 존재까지.
하지만 기숙사생 대부분의 입사 여부는 ‘스무 살의 주체적 결정’이 아닌 ‘부모의 반색’ 아래 결정되었다. 다시 말해 기숙사 입사생 대부분은 정글과도 같은 세상을 경험하기보다는 일정 기간 부모의 품에 남기를 개인적-사회적으로 ‘강요받은’ 것이다.
학생 복지를 위한 배려에 감사하며 뿌듯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입사 비용이 비싼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후 펼쳐진 상황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불과 몇 년 뒤에는 안암동 신축 원룸 월세에 버금가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입사할 수 있는 민자 기숙사가 만들어졌는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방으로 들어서면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입구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경비원 아저씨가 계신다는 게, 그리고 무언가 고장이 나면 시설부 직원이 달려온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과열되고 있는 부동산 시장을 고려하면 대학교나 공공 주도하에 지어지는 기숙사는 20대, 그리고 대학생에게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현실적 주거 대안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기숙사는 여전히 턱없이 적은 수의 학생만을 수용하고 있다. 명색이 명문 대학이라는 K대가 번듯한 기숙사 하나 올리고 싶지 않았을까? 답보 상태에 빠진 기숙사 수용률의 이면에는 안암동 인근 임대업 종사자들의 입김이 작용한다.
주민이라 쓰고 임대업 종사자라 읽는 사람들은 대학 소유 부지에 대학의 자본금으로 학교 기숙사를 짓는 걸 반대한다. 구의원에게 득달같이 달려가서는 드잡이를 하며 압박을 놓는다. 건축 승인 떨어지면 다음 선거 때 두고 보자며 매섭게 노려본다.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감성적이기 그지없다. 아침저녁 오르는 개운산을 공사판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 말 뒤에 숨겨진 속마음을!
“월세 업자 다 굶겨 죽일 셈이냐?”
2009년, 첫 자취
처음으로 자취 생활을 시작한 건물 1~2층에는 주변 대학생들이 드문드문 방문하는 식당이 있었고, 3층에는 몇몇 중국인이 함께 모여 지냈다. 기숙사와 마찬가지로 낡은 이 건물은 색바랜 벽돌이 덕지덕지 붙은 외관만큼이나 향수를 자아내는 좁은 통로를 지니고 있다. 키가 작은 나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일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1980년대 감성이라 미화하기에는 어느 취한 밤에 올라야만 하는 가파르고도 좁은 계단이 썩 달가울 리 없었다. 백미는 3층 통로에서 옥탑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 살찐 친구는 난간에 허리가 낄 정도로 좁은 계단이었지만 나름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 같은 신비한 운치를 지니고 있는 그런 계단이다. 그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월세 45만 원짜리 옥탑방을 만날 수 있다.
가건물을 덧대어 증축했지만 원룸에 해당하는 공간은 처음 준공되었을 때부터 건물에 딸린 일종의 창고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돌로 지어진 방의 골조가 나름 단단하고 가건물로 증축된 건 부엌과 화장실에만 한정된 덕분에 나의 옥탑방 생활은 일반적인 옥탑방(조악한 가건물)의 살인적인 기후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만 여섯 평 정도로 넓은(?) 방이었던지라 더위와 추위를 모면하기 위한 전기세와 난방비를 많이 지출했다는 게 흠이라면 흠. 그리고 벽돌의 자재 특성으로 인해 냉기와 열기가 신의 계시처럼 천장에서 은근히 내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동기나 후배들을 여섯 명이나 재울 수 있었던 건 (장점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살던 옥탑방이 유일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와 ‘네 멋대로 해라’가 떠오르는데, 두 드라마는 한결같이 옥탑만의 낭만을 그려낸다. 물론 옥탑만의 낭만은 있다. 옥상 공간이 오롯이 내 차지였기 때문에 빨래를 널 수 있고, 잠도 오지 않는 여름밤이면 옥상을 서성이며 담배 한 대에 별 하나를 겹쳐 보며 감상할 수 있다.
친구들과 옥상을 서성이며 왁자지껄 수다를 떨어도 소리는 뻥 뚫린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심지어 노래를 불러도 소음과 관련해 컴플레인을 받은 적이 없다. 가끔은 학교 후문에서 집 근처로 이어지는 골목을 옥상에서 내려보다 열심히 길을 걷는 동기를 소리쳐 부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낭만과 긍정을 한 줌 재로 날려 보낼만한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모자를 눌러쓰면 강의 시작 5분 전에 집을 나서도 지각을 면할 수 있다는 입지적 장점만으로 낡디낡은 건물 위 증축한 옥탑방의 월세 45만 원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일까?
20대에게 가성비가 좋은 돈벌이 중 하나인 과외의 급여는 몇십 년째 그 시세가 제자리걸음인데, 월세는 오늘도 상승일로를 걷는다. 과외조차 들어오지 않는 젊은이들은 재능 또는 전공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단순 노동 아르바이트에 내몰린다. 자본주의 생리상 불가피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걸까? 빚 권하는 사회 속에서 여기저기 치이는 청년들은 한바탕 울어볼 만한 몇 평 공간조차 자기 소유로 둘 수 없다.
2012년, 복학 후
숨 막히게 허름한 공간에서만 대학 생활 2년에 군 생활 2년을 더해 도합 4년을 지낸 뒤 결심한 게 하나 있다. 제대 후 복학을 하면 멋진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며 제대뽕에 취해 있던 그때, 그러한 두근거림에 어울릴만한 산뜻한 공간에서 머물겠다고.
적어도 방안에 드럼세탁기 하나쯤은 있어야 편할 것 같았고, 끈적끈적한 고무 장판이 아닌 빳빳한 나뭇결을 살린 장판 위로 걷길 원했다. 그러나 ‘돈’이라는 절대 권력 앞에서 나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한 그 모든 조건을 알량한 돈 몇 푼으로 얻을 방법을 찾던 나는 땅속에 살포시 코를 박고 지내기로 했다.
옥탑방은 지상에서 울려 퍼지는 삶의 소리가 닿지 못하는 하늘 위 고독한 공간인 반면 반지하 원룸은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나의 정수리 높이로 오가는 요란한 공간이다. 물론 여기서 요란함이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반지하 원룸 세입자는 두 눈으로 창문 밖 거리를 오가는 행인의 신발 모양새와 보폭만을 쫓는다. 주변 거리의 요란한 소음 속에 살아가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의 숨결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 처절한 감각을 극대화하는 두 가지 무대 장치가 있으니 바로 제한적인 일조량과 반지하 특유의 습함이다.
지하와 지상에 절반씩 걸쳐 있는 반지하 공간은 태생적으로 원룸 건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적은 양의 햇빛만을 받는다. 덕분에(?) 반지하 원룸에는 하루 24시간 어느 때나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짙은 어둠이 감돈다. 어둠을 사랑하는 태생적 기질을 가졌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태양의 자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나는 불행히도 주기적으로 볕 바라기를 해야만 하는 성정을 지녔다.
그 결과 1년간의 반지하 생활 동안 어둠의 마수에 취한 채 몽롱한 일상을 보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생활은 멀어져만 갔고, 질척이는 어둠에서 탈출해 밖을 활보하다가도 다시 방으로 들어설 때면 우울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햇빛과 차단된 환경보다도 나를 힘들게 한 건 반지하만의 습한 환경이다. 어둠은 나를 은근하게 잠식해갔지만 마르지 않는 빨래는 그 퀴퀴한 냄새만큼이나 자극적으로 나를 분노케 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방바닥을 신문지로 도배할 수밖에 없었는데 신문지는 반나절이면 흐물흐물하니 습기를 머금었다. 흐물흐물 의식적인 코마 상태에 놓인 채 솜처럼 젖어 잠을 청했고, 동이 트면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메마른 신음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나의 반지하 생활은 행복했노라 고백한다. 봉제 공장에서 일하고 판자촌에 우글우글 모여 생활하던 1970년대 소년공의 이야기가 회상에 곁들이는 안줏거리 정도로 취급받는 시대. 하지만 2017년 서울 하늘 아래도 더위, 추위, 습함과 사투를 벌이는 젊은이가 여전히 많다. 그들은 인간적인 주거 생활을 꾸리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최소한의 조건조차 누리지 못한다.
나아가 한 평이 채 안 되는 고시원에서 목과 무릎을 굽혀가며 꾸깃꾸깃 잠을 청하는 청년들은 오죽하겠는가? 인간적인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 보장을 고민하지 않는 사회, 만인의 만인에 대한 러시안룰렛을 종용하는 매몰찬 사회. 나는 상식에 발을 딛고 외쳐본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으면 두세 평 원룸을 임대하기 위한 보증금과 월세를 충당할 수 없는 사회, 청년에게 노오력하라 외치는 게 정상인가요?”
2013년, 비로소 사람답게
나는 요즘 서울살이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사람다운’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는 창문으로는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덕분에 습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은 지는 좀 되었지만 건물 자체가 튼튼해서 방음, 방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압도 괜찮고 관리비에 난방비가 포함되어 있어 온수도 펑펑 사용할 수 있다. 창문을 열면 사찰 부지에 방치된 건물에서 유치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플래카드가 보이지만 그것조차 사람 사는 풍경처럼 느껴져 사뭇 흡족하다. 새벽 4시만 되면 절에서는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침대, 책상, 옷장을 두니 사람 한 명 지날 정도의 통로만 남았지만 나는 괜찮다. 방 안에 빌트인 세탁기가 없어 복도 끝 공용 세탁기를 써야만 하지만 나는 괜찮다. 방 안에서 가끔은 이리저리 서성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 방에만 들어가면 궁둥이를 붙이고 앉을 공간이 없어 침대에서 기거하며 와식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는 괜찮다. 대학교 기숙사를 올라가는 길목인지라 학기 중에는 밤만 되면 다양한 언어로 취기를 뽐내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다.
기본적인 생활환경만큼이나 흡족한 건 결격사유 없는 이 방에 전세 세입자로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관리비가 월 13만 원으로 사실상 반전세에 가깝긴 하지만 그 안에 난방(온수)비, 수도세, 인터넷 요금, 기타 공용공간 청소비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니 (현실적으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생살을 도려내듯 월세를 이체하지 않아도 되니 컴컴한 어둠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쫓아 ‘더 나은 집’이란 희망을 꿈꿔볼 만하다.
그렇다. 나는 ‘내 집을 마련하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집에 세입자로 들어갈 수 있기를’ 꿈꾼다. 쓸데없이 눈만 높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적게 받더라도 서울살이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한 나는 전례 없는 엄청난 기적(이를테면 로또)이나 대출 없이는 평생 누군가의 세입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개척하고 있다.
사후 납골당에 입주할 때는 누구나 공평하게 부동산 문서 없이 들어간다는 게 약간의 위로가 된달까? 헛소리에 망상을 곁들이며 나는 너덧 평 방안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희망찬 빛을 쫓기에도 바쁜 이십팔(주의해서 읽을 것) 청춘. 조물주의 예정에 없던 자욱한 빚에 휩싸여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어느 배구공에 얼굴을 그리고 이름을 붙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기에는 단단한 희망을 품는 것조차 병인듯해 마음 한쪽이 아린다.
그렇다면 집을 갈구하기보다는 YOLO를 외치며 이 시대를 즐겨야 하는 걸까? 에라 이 사람아! You (can) Only Live (in) One-room이다. 시대는 나의 손길 밖에서 날로 메말라 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몇 없어 씁쓸하다. 빛이 있으라 하니 그곳에는 빚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