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게이머에 도전했다
고3을 막 마친 20살. 당시 최고 성적은 온게임넷 HP배 워크래프트 3(이하 워3) 오프라인 예선 32강, 아시아 랭킹은 50위. TV 리그는 16강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한 명을 더 이기면 TV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 김대현(Fusion[Saint]) 선수의 블레이드마스터가 휠윈드를 돌면서 꿈은 사라졌다.
몇 번 더 도전했지만 온게임넷과 MBC게임 오프 예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마지막 상대는 이형주(Check[Pooh]) 선수. 어중간한 휴먼 플레이어였던 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삼수까지 했는데 세상과 단절하고 공부를 위해 갔던 광주 할머니 집 근처 고시원에서 이거 타고 다니라고 원장님이 주신 자전거로 시내를 구경하다가 하필이면 시간당 500원 피시방을 발견하는 바람에 다시 게임에 미쳐 삼수도 실패하고 군대로 도주했다. 한 끼를 포기하면 PC방 6시간!
아무튼 게임 한번 안 해본 꼰대는 아니라는 말이다. 질리도록 해봤다. 그야말로 1980-1990년생 라인의 ‘그날이 오면 – 포가튼 사가 – 삼국지 시리즈’에 아동청소년기를 바친 순혈 게이머다. 중고딩 때 점심 안 먹고 담 넘어 피방 가서 팀플 한판 하고 돌아온 경험이 있는 그 당시 여느 학생 중 한 명이다. 아직까지도 그때 친구를 절망시킨 리버드랍의 추억이 남아있다.
그 후에는 대학 졸업 후 게임개발자가 되어 수년간 여러 회사에 들어가 몇몇 게임을 만들다가 현재는 스타트업 올비를 공동 창업해 신생아용 웨어러블 디바이스와 앱을 만드는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2012년에 개인 개발로 만든 인디게임은 아이폰 앱스토어 한 카테고리에서 연간 최다 판매가 됐던 경험도 있다.
그렇게 게임과 함께 젊음을 보낸 사람이 어른이 되어 다시 게임에 대해 생각해본다. 현장감을 느끼기 위해 이 글은 피시방에서 적고 있다. 자정이 불쑥 넘은 시간에 역시 많은 사람이 게임을 하고 있다. 옆자리의 마이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나름의 희열을 느끼고 있다. 요새는 오버워치도 많이들 한다. 여성 FPS 유저도 늘어난 걸 보니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왜 게임을 할까?
아이들이 게임을 하는 건 한창 놀 때니 그렇다 치고. 어른들이 왜 이렇게나 게임을 할까? 당신이 나처럼 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간단히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리만족이다. 승리의 쾌감이다. 달성의 만족감이다. 팀 안에서 내 역할이 있다는 소중한 감정이다. 게임을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대리만족이 왜 필요할까? 현실에서는 승리를 경험해보는 일이 매우 어렵고 드물기 때문이다. 만족할 만큼 소유할 수 있는 것도 매우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런데 게임을 잘하면 (그 세계 안에서) ‘인정’받는다. 중요한 존재가 된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참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약한 존재며 유치한 마음을 갖고 있다. 조금의 칭찬이나 성취감으로도 현실을 잊고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나라는 존재가 필요한 자리가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다. 이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승리하는 경험이 많으면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 뭐하러 게임을 하겠나? 인생이 더 재밌고 게다가 리얼인데.
하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너무 확 멈췄다), 게임의 트렌드 변화를 살펴보자. 2000년대를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리니지 등등이 주름잡았다면 2010년 이후는 누구에게 물어보든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LOL, 이하 롤)’다.
원조 전설의 게임인 스타의 후속작 스타2가 나왔지만 롤에 밀려 망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타가 지고 롤이 뜬 이유가 무엇일까? 롤이 더 잘 만들었고 열라 재밌으니까? 물론 그 말이 맞는데 왜 더 재밌을까?
하루하루를 누가 더 재미없게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프로게이머 시절을 다시 꺼내서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1년간의 도전이 실패했던 원인은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노력’이 부족했다. 당시의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까지 삼을 수 있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거야. 참 재밌을 거야.”라고 믿었다.
놀라운 것은 그 좋아하는 게이머가 되는 과정에서 이전에 공부하며 느꼈던 기분을 정확히 똑같이 느꼈다는 것이다. 프로게이머들이 즐겁게 게임을 하는 것 같은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승리하는 그들은 정말 즐기는 자일까?
결론부터 말해 아니다.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과정과 프로게이머로 성공하는 과정은 거의 같다. 서울대를 가보지도 못했고 성공한 프로게이머 또한 못돼 봐서 이런 말을 하기가 좀 그렇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연습, 연습, 연습 또 연습이다. 물론 적성과 재능이 동반되어야 하겠다.
오프라인 예선전을 준비하는 동안 연습게임을 해야 하는데 한판 하고 나면 진짜 다시 하고 싶지가 않다. 지기라도 하면 그로기 상태가 되는 것이 마치 수능 모의고사 한 과목 풀었을 때와 매우 비슷하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보자. 한 과목 끝나면 곧 그다음 과목을 펼쳐서 푼다. 다음날 또 그렇게 하고, 그다음 날 또 그렇게 한다.
게임 잘하는 애들이 어떻게 하냐면 한 게임 끝내고 바로 다음 판을 또 한다. 당시 내가 떨어졌던 HP배 워3 리그의 우승자인 김대호 선수도 대회 연습게임만 500판을 했다나. 당시 래더 1-3위 계정이 모두 김대호 한 사람이었으니 말 다했다. 이름을 날렸던 프로게이머 모두 동일하다. 미친듯한 연습이다. 게임하니 재밌지 않겠냐고? 거기에 재미고 즐거움이고 없다. 정말 없다.
손꼽히는 프로야구선수 중 한 명인 삼성 라이온즈 윤성환 선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하루하루를 누가 더 ‘재미없게’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다.”라고 자신의 비결을 밝혔다.
UFC 정찬성 선수는 조지 루프에게 하이킥 KO를 당한 후 “나는 싸움을 하러 들어갔는데 루프는 스포츠를 하고 있더라”라고 아쉬움을 밝혔다. 잘 훈련된 기계적이고 영리한 움직임에 당했다는 말이다.
아무리 못해도 10판 중 4판은 이긴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롤이 정말 재밌는 게임이 된 이유는 5:5 게임방식과 섬세하고 분화된 역할 부여에 있다고 본다. 당시 스타는 팀플도 많이 했지만 1:1 진검승부를 베이스에 두고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승부에서 승리하는 쾌감은 참 대단하지만 그만큼 피로도를 동반하는 방식이다. 졌을 때의 좌절감도 매우 크다.
이런 방식의 게임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롤은 5:5를 베이스에 두고 만든 게임이다. 각자 역할이 있다. 탱커, 암살, 딜러, 마법사, 서포터. 예전 스타크래프트는 2:2에서 지고 나면 벌써 누군가는 ‘나 때문에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롤은 내가 아무리 못해도 잘 모르고, 팀이 이기는 상황도 꽤 된다. 요즘 게임들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알고리즘에 의해 굉장히 비슷한 수준의 상대방을 매칭 해준다. 이쪽에 트롤(너무 못해서 게임을 망치는 유저)이 있으면 저쪽에도 트롤이 있다.
게임 감각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면 비교적 쉬운 서포터로 시작하라는 추천을 받는데(오버워치라면 자리야나 루시우로 가라. 겐지 고르지 마라), 서포터를 선택하면 캐릭터가 사망하는 일이 적다. 그야말로 승리의 쾌감은 유지하고, 반면 패배의 충격은 기존 게임들에서 느꼈던 것과 비할 바 되지 않는다.
여기에 블리자드에서 내놓은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Heroes of the Storm, 이하 히오스)’은 질세라 더 파격적인 시스템을 내놨다. 팀원의 레벨이 공유되어 모두 똑같은 레벨이기 때문에 누가 트롤인지 쉽게 찾아내기도 어렵다. 심지어 화장실 간 사이에 게임이 시작되어도 역전해서 이기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온다. 또 채팅으로 욕하는 사람이 2명 이상에게 신고당하면 계정이 일시 정지되는 건전 시스템도 넣었다.
이런 게임사의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패배의 피로도를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게임은 재밌자고 하는 것이고 승리의 경험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게임들의 트렌드이다. 승리의 쾌감은 더 많은 사람이 나눠 갖는다. 캐릭터마다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 결과 아마 자기가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착각)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과거 스타크래프트 같은 경우는 반마다 확연한 짱이 존재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감이 오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게임을 만든 회사를 보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위대한 사람들’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도 아픔을 경감시키는 기술이 주목받는다. 격투기에서 패배한 선수가 종종 정신병을 겪게 되기까지 하는 일들이 알려진다. 프로야구 각 구단은 카운셀러를 고용해 팀에 배속시킨다. 그리고 게임산업은 정말로 큰 산업이다. 플레이어가 매우 많고, 돈이 매우 많이 몰리고,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고객의 반응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발전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곳이다. 현재 다양한 산업 분야에 걸쳐 데이터 분석과 그로스 해킹이 자리 잡는 분위기지만 게임업계에서는 이미 그것을 위해 밤새 싸워온 사람들이 과거부터 즐비했다. 그들이 현재 여러 산업 분야로 넘어가 그로스 해킹 등을 이끌고 있다. 그 사실을 NHN 및 한게임 출신으로 현재 한국 그로스 해킹을 이끄는 사람 중 한 명인 고영혁(Dylan Ko)씨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통해 알 수 있다.
위험 포트폴리오의 관리
혹시 게임의 이런 ‘패배의 충격을 매우 경감시키는’ 트렌드 변화를 내 삶에도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안양대학교 컴공과에 입학했는데, 당시 인서울은 해야 사람이 되던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이 학교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로게이머에 도전하고, 돌아와서 재수를 하고, 삼수를 하다가 포기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야 복학을 했으니 이젠 강제로 내 위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의 끝에서 시작된 개발 공부는 웬걸 너무 재미있었다. 거기다 존경하는 교수님을 만나 정말 큰 은혜를 입었다. 매일같이 내게 수업 외 과제를 내주었고 회사에 연결해 업무까지 해볼 기회도 주었다. 또한 동아리에서 만난 선후배와의 관계는 지금도 나를 지탱해주는 존재다.
갓 입학했을 때 상실감과 패배감에 빠지지 않고 만약 “이제부턴 내가 개발을 배워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겠구나!”라며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즐거운 삶이 5년은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 돌아온 것도 내게 소중한 추억이어서 후회는 전혀 되지 않지만 아쉬움은 있다.
21세기 가장 영향력을 주는 책 중 하나인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자신의 책에서 ‘위험 포트폴리오 관리‘의 중요성을 시작부터 책 마지막까지 질리도록 언급한다. 사전을 찾아봐도 구글링을 해도 뜻을 알 수가 없었고, 번역이 의심스러워 서점에 가서 원서로 봐도 같은 단어로 적혀 있었다.
사실 ‘위험 포트폴리오 관리’는 주식시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저자는 이를 사람에게 적용해서 사용했다.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한 분야에 리스크를 감수하는 행동을 했다면 다른 분야에는 그보다 훨씬 안정적인 스탠스를 취함으로써 전체 리스크를 경감시키는 관리방법을 행했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가공의 패배감에 무기력해지지 말자. 얼마나 많은 대학생이 졸업을 앞에 두고서야 ‘아, 이 길이 아니었던 것 같아’하며 절망하는지 알게 된다면 놀랄 것이다. UFC 아시아 최다승 김동현 선수가 PC방 알바를 하다 뛰쳐나갔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길이 당장 보이지 않는다면 워킹홀리데이 등을 통해 일단 있던 곳을 떠나 시야를 넓힌다든지, 전과 등 종목을 바꿔보는 것도 매우 추천한다. 무엇이든 시도해보자.
요즘 플레이하는 환상적인 게임 ‘댄싱 라인(DANCING LINE)’을 추천하면서 글을 급히 마무리해본다. 설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착각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