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요즘에도 ‘김여사’라는 말이 여성혐오적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운전에 서툰 일부 여성 운전자들을 일컫는 말일뿐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내는 운전자의 80%가 남성이라는 과거의 통계를 떠올려보면 ‘운전에 서툰’과 ‘여성 운전자’를 붙여 말하기란 민망해진다. 그러니까 ‘김여사’는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된 말이다.
그렇다면 ‘김여사’라는 단어를 내뱉는 이들이 내심 욕하고 싶은 포인트는 ‘운전에 서툰’이 아니라 ‘여성 운전자’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여기서 ‘일부’ 여성 운전자라며 여성 전체를 칭하지 않는 척 한정 짓는 것은 이런 내심을 숨기려는 의도일 것이다. 어떤 멸칭이 칭하는 대상을 ‘일부 여성’으로 한정 짓는다는 맥락에서 ‘맘충‘에 관해 생각해본다.
며칠 전 연합뉴스는 ‘아이는 특권이 아닙니다’라는 카드뉴스에서 “최근 일부 엄마가 ‘아이 먹일 것’이라며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제2의 맘충 논란이 불거졌”다는 내용을 썼다. 기사에는 몰지각한 일부 육아 여성을 제외한 평범한 대다수의 육아 여성들이 이들 때문에 2차 피해를 입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기사는 균형 잡힌 척, 몰지각한 이들만을 비판하는 듯하지만 이 기사의 그런 갈라치기가 ‘김여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열하다고 생각한다. ‘맘충’이라는 단어로 가장 행동을 조심하게 될 이들은 누구인가. 몰지각한 일부 육아 여성일까, 아니면 육아 여성 전체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행동을 조금만 잘못해도 ‘맘충’으로 몰리는 세상에 사는 육아 여성들의 삶이 쉬울 리 없다.
기사에서는 이들이 ‘맘충’ 때문에 2차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2차 피해가 아니라 ‘맘충’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들과 언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것이다. 직접적 가해자인 연합뉴스가 이들을 위하는 척 2차 피해라는 말을 쓰는 건 기만이다.
기사는 “그동안 일부 식당에서는 아이를 배려해 식사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곁들여 제공”한 것이 “아무 대가 없이 단순히 호의로 챙겨주는 우리나라 특유의 ‘정(情)’ 문화” 덕분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건 육아에 대한 사회적 배려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육아를 온전히 개인에게 부담해선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 이루어진 사회적 합의가 아니던가.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이나 육아 여성의 사회적 배려 요청이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배려하지 못하고 되려 후려치는 사회에선 아이도, 여성도, 종국엔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다.
원문: 윤지만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