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라는 말이 한국을 배회하기 시작한 것도 아주 오래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창의력을 교육하기 위해, 그리고 창의력 있는 인재를 뽑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오히려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행학습의 만연을 불러온 것이다.
왜 창의력이 선행학습을 만들어 낼까? 사람들은 흔히 아주 잘못된 가정을 하고, 그 잘못된 가정은 반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정이란 이런 것이다. 교사나 교수는 창의력이 있는 인재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것도 특히 다수의 학생들이 응시하는 시험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의력이 달리기 기록이나 키, 혹은 몸무게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일까?
간단한 수학퍼즐에서 새롭고 신기한 풀이 방법을 알아낸 학생은 나중에도 창의적이고 새로운 일을 할 확률이 반드시 높은가? 수학에 창의적이면 문학이나 스포츠에서도 창의적인가? 미적분을 잘하면 집합론도 잘하는 것일까? 나중이라면 얼마나 나중인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어떤 기준에서든 창의력 점수가 높았던 사람은 커서도 그런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에게 수학퍼즐로 점수를 매기면 그것이 앞으로 그 학생들이 얼마나 창의적인 일을 하게 될지 측정 가능할까? 그런데 이건 그냥 퀴즈왕을 뽑는 거 아닌가?
이런 복잡한 질문은 답이 있을 것 같지만 없다. 조건과 그 결과의 상관 관계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매우 복잡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통계가 존재하기도 어렵고 존재해도 그 가치를 알기가 어렵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본다고 해도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그저 평범한 사람과 아인슈타인의 차이인지, 아니면 정말 간발의 차이인지 말해줄 기준이다. 창의력같이 애매한 말에 미래의 성취를 객관적으로 예측할 기준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 그러니 그런 기준으로 이 학생은 미래가 없고 저 학생은 미래가 확실하다고 결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교사나 교수에게 창의력을 시험 점수로 측정하라고 하면, 시험으로 창의력 있는 인재를 뽑으라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세상에는 물론 확실히 창의성이 있어 보이는 감탄스러운 천재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는 창의력이 뭔지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나 교수 중 압도적 다수는 그런 천재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창의력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거나, 아는 척을 해야 한다. 사실 사회가 그들에게 창의력 있는 인재를 뽑으라고 요구하는데 나는 창의력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에 자신이 많은 사람만이 솔직하고 당당하게 나는 창의력이 뭔지 모른다고 말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교수는 도대체 뭘로 창의력을 측정할 것인가?
결론은 뻔하다. 본 적이 없는 문제를 내서 그걸 풀면 창의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교사·교수는 학생이 전에 본 적이 없었을 문제를 더 열심히 뒤지는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를 만들어 내면 되지 않냐고? 그런 문제를 양산할 능력이 있다면 아마 창의력 테스트 문제 따위를 내는 입장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창의력으로 훨씬 천재적인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이 바로 더 고급 과정의 문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중학생은 고등학교 과정을 아직 안 배웠을 것이고 고등학생은 대학생 과정을 안 배웠을 거라는 가정에서 학생이 아직 배우지 않은 고급 과정의 문제가 창의력 테스트 문제로 둔갑한다. 중학생한테 미적분 문제 물어보는 거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미적분을 배우지 않은 중학생 아이가 극한이나 구분구적 같은 미적분 기초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면 뉴튼이나 라이프니츠 같은 천재 과학자의 재능을 가진 것을 확인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진심일까? 세상에 뉴튼이나 라이프니츠가 우글우글할 수가 있는가? 시험을 내는 본인은 뉴튼이나 라이프니츠 같은 천재인가? 이런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창의력을 강조할수록 아이들은 선행학습에 빠져든다. 창의력 있는 아이들을 뽑는다는 시험은 결국 선행학습을 잘한 학생을 뽑는 시험이 되고 만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고급 과정에서 깊은 이해를 요구하거나 복잡하게 여러 분야가 섞여있는 문제를 뽑아서 학생에게 질문을 하면 그건 당연히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교수나 교수들은 고급 과정에 있는 문제들 중에서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지식들을 고른다. 결국 이런 시험에 적합한 공부란 지극히 표면적이고 암기적인 공부가 되고 만다.
문제는 내는 사람은 되도록 예기치 못한 문제를 내려 노력하고, 학생들은 되도록 넓게만 공부해서 그런 출제 경향과 싸운다. 이렇게 해서 창의력이 있는 학생을 뽑기 위한 시험은 실은 가장 창의력 없이 공부하면 통과하기 쉬운 공부가 된다. 되도록 넓은 분야의 예제들을 깊은 이해 없이 많이 풀고 그저 외우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이 많으므로 어딘가에서 호기심이 생겨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냥 많이 하고 외워야 한다. 그래야 창의력 점수가 올라간다. 이게 정말 창의력 테스트인가?
창의력 테스트라는 말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처럼 자체 모순적이다. 우리가 창의력을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테스트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테스트라는 말은 어떤 정해진 테두리 안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테스트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마치 신과 같은 천재라서 학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고 평생 노력해도 쫓아갈 수 없는 경지에 있어서 학생을 테스트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창의력을 테스트한다는 것은 테스트를 하는 사람의 관점에 갇혀 있는 학생을 뽑는 일이 된다.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인가? 지금의 교사·교수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할 학생들을 뽑고 싶은 거 아닌가? 결국 우리가 창의력을 테스트할 수 있는 상대는 기껏해야 갓난아기 정도다. 그런데 아기의 창의력을 테스트해도 그 결과가 성인이 된 후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창의력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학생을 잘 선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더 많은 학생에게 배움과 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창의력 있는 학생만 잘 뽑아서 그들에게만 투자해 나라에 혹은 회사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발상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당첨될 복권만 사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당첨이 될 걸 미리 알면 그게 복권인가? 창의력에 대한 오해가 게임의 법칙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런데도 어른들은 열심히 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우겠다고, 창의력 있는 인재를 뽑겠다고 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너무나도 바빠졌다. 어떤 면에서는 학생들의 학력이 30년 전에 비해 오히려 떨어졌다. 예전에는 공부할 것, 해야 할 것이 단순했는데 요즘에는 너무 많은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만 해도 그렇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소개서를 대학이 얼마나 진지하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학생들은 엄청난 시간을 써야 한다. 소개서 자체를 쓰는 것도 그렇지만 그 안에 집어넣을 내용을 만들기 위해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한다. 그렇게 바빠서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초·중학교 때 어떻게 컸는지 아이에게 말해주면서 모순을 느낄 때가 많다. 우리 때에는 고교 평준화 이후였고 대학 입시만 열심히 공부했을 뿐 고등학교 입학을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초등학생은 자유시간이 많았고 중학생도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한가했다. 그 한가한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물리학자의 꿈을 키웠고, 산에 가서 숲속을 돌아다니며 나무와 풀을 보는데 썼으며, 그 한가한 시간을 써서 화학 실험을 하거나 친구들과 컴퓨터나 영화나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몰려 다니거나 하면서 컸다.
경진대회 따위가 없어도 관심이 있는 아이는 로케트도 만들고 화약도 만든다. 이력서에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말이다. 내 독서가 멈춘 것은 바로 대학 입시에 바빠졌던 고등학교 입학 이후였다. 창의력을 테스트하겠다고? 창의력을 키우겠다고? 지금 세상을 보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