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님, 어그로의 상태가…?
서민체험. 그 공허한 단어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시장을 방문하여 상인들과 악수를 나누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개중에는 “버스비 70원쯤 하나?” 발언으로 물의를 빚으며 처참히 실패한 사례도 있었지만 찰진 국밥 먹방을 찍으며 대박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벤트의 성패를 떠나 그 서민체험들이 실질적으로 ‘체험’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던 7월 말, 40도에 육박하는 111년 만의 폭염은 한반도 전역의 생명체에게서 곡소리를 뽑아냈다. 그 와중에 박원순 시장은 난데없이 서울시청에서 나와 삼양동의 옥탑방에 입주했다. 누가 봐도 사서 더워하는 사진에 SNS가 들썩였다. 이 날씨에 굳이 ‘서민체험’ 한다면서 선풍기도 아니고 부채를 부치고 앉아 있다고?
당시로서는 ‘아 이 아저씨 또 시작했네’ 소리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속했던 한 달은 지났고 8월 19일 강북문화센터에서 박원순 시장의 옥탑방 한 달 살이 기자회견이 열렸다. 별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보도자료를 읽는 순간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어그로’를 끌어가며 일을 벌였는지 이제 조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자료에는 삼양동에서 출발해 강북구, 동북권을 거쳐 서울 전체로 확장되는 소위 ‘빅픽쳐’에 대한 구상이 담겨 있었다.
옥탑방 살이를 한 건 정책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낙후된 강북 지역에 대해 서울시가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지역 간 격차를 줄여보겠다는 것이다. 이날 박원순 시장이 발표한 균형발전을 위한 지원 방안은 6개 분야에 걸쳐 다양했다.
- 교통: 비강남권 4개 철도 노선 재정사업 전환, 공공시설 나눔카 주차장 설치 의무화
- 주거환경: 빈집 1000호 매입, 신축 불가능 지역도 소규모 정비모델 촘촘히 도입
- 골목 경제: 주민 주체 ‘선순환 경제 생태계’ 구축, 마을 단위 ‘생활상권 프로젝트’
- 교육, 문화, 돌봄 인프라: 대학 연계 교육 프로그램과 인프라 확대로 양극화 해소
- 공공기관 강북 이전: TF 통해 연내 확정, 서울주택도시공사 등 우선 검토
- 재정, 조직: 1조 원 ‘균형발전특별회계’, 1구 1시설로 낙후지역 집중 ‘투자기준 대전환’
다소 파편적이고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핵심은 ‘강북을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방향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원순 시장이 지냈던 강북구 삼양동의 경우 북한산에 접해 있는 만큼 가파른 경사의 언덕을 따라 조그만 집들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지역들의 골목길은 젊은 사람들조차 다니기 쉽지 않으며 노약자는 특히 취약하다. 게다가 평지가 적어 쉼터나 주차장, 문화시설 등이 부족하다. 유동인구도 적어 수익성 있는 철도가 들어서기도 힘들다. 주택이 낡아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강북 자체의 인프라도 열악하고 기본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은 동네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히 떠나게 된다. 들어오는 인구보다 나가는 인구가 많으면 빈집이 생기고, 빈집은 마을이 활력을 잃게 만들고, 그러면 다시 사람들이 떠난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지역발전이나 활력을 논하기 이전에 일단 객관적으로 살만한 조건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비강남권 철도노선 4개를 시비를 들여 사업을 진행하고, 공영주차장에 공유 자동차를 배치하고, 언덕에 전기 따릉이, 경사형 모노레일이나 곤돌라를 설치하고, 노후주택을 손보는 등의 지원사업이 그런 맥락이다. 사실상 강북구 지역민들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정책에 가깝다.
“이거 강남 역차별 아님?”
혹자는 이러한 방침을 강남에 대한 역차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살기 좋은 강북을 만들겠다며 신규 국공립 어린이집을 비강남권에 90% 집중시키고 새로운 상업지역 허가도 비강남권 역세권을 중심으로 허가하겠다는 대목은 분명 그렇게 보이긴 한다. 그러나 지금의 강남-강북 격차는 순전히 정부의 도시계획이 원인이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강을 건너지 못한 1백만 명가량의 시민이 공산 치하에 남겨져 고초를 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때였고 1960년대 후반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던 시기였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한강 남쪽, 강남으로 눈을 돌렸다.
- 한종수·강희용, 『강남의 탄생』 中
1970년대 강남에 지하철 2호선과 도로가 깔리고 아파트 대량 공급과 함께 강북에 위치한 명문고와 법원, 경찰청 등의 주요 정부 기관이 이전하는 등 정부 주도로 인프라가 대규모 확충됐다. 그렇게 강남이 도시개발 정책의 수혜를 보며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강북지역은 택지개발 제한, 상업시설 신규설치가 금지되는 등 개발이 억제되어왔다.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두 지역 간 격차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사회적 불평등이 이렇게 가시화되기까지 정부의 책임이 컸다면 마땅히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부동산 말고, ‘마을 공동체’
우선 서울시는 강북구 주택 수리사업을 집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같은 예산으로 같은 사업을 집행하더라도 지역 바깥의 큰 건설회사에 맡기는 것과 지역 내 업체에 맡기는 것은 그 파급효과가 다르다. 후자의 경우가 전자보다 발생한 이익과 사업 경험 등의 무형 자산이 그 지역에 머물면서 지역상권 활성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였던 지금까지의 접근 방식에 비추어보면 확실히 다르다. 주택 수리사업뿐 아니라 돌봄, 주차장 공유, 재활용 등 주민 수요를 기반으로 사업 아이템 발굴도 지원한다. 공공사업 입찰 시 가산점을 부여하고 연수원에서 전문성을 키울 수 있도록 훈련을 지원하기로 했다.
‘생활상권 프로젝트’도 시작한다. 그동안 주로 전통시장 중심으로 이뤄졌던 공공지원의 대상이 소상점가까지 확대된다. 상품 개선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하거나 필요하다면 유망업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 상권 내 빈 점포를 각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공동 작업 공간이나 커뮤니티 시설로 조성하여 동네 주민들의 복지에 기여하도록 할 계획이다.
어쨌든 중요한 포인트는 서울시가 협동조합이나 마을 기업 등 지역의 사회적 경제 주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마을 공동체에서 강북구로, 다시 서울시 전체로 효과가 확산되는 ‘아래로부터의 성장’이라는 큰 그림을, 박원순 시장은 삼양동의 옥탑방 생활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계획들이 단순히 계획에서 끝나지 않고 실행에 옮겨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 있을까? 아무래도 재원이 마련되었는지 여부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시는 이미 1조 원 규모의 ‘균형발전회계’를 별도로 조성해 균형발전의 재원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또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균형발전담당관’도 기획조정실 내에 내년 1월 신설한다.
‘쇼’라고 비난해도 삼양동의 오르막은 누군가에겐 여전히 가혹하니까
기자회견을 들으며 이상의 내용을 대강 정리한 뒤 곧장 삼양동 옥탑방을 찾아갔다. 그래도 직접 가보고 써보는 것이 이치에 맞겠다 싶어서였다. 직접 가보니 거기에는 화면에서 보아 익숙해진 오르막이 있었다. 쉬지 않고 끝까지 한 번에 올라가 봤다. 종아리 근육이 욱신거릴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내가 나이를 먹는다면 이 경사를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재밌는 점을 하나 발견했다. 워낙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이 많다 보니 언덕 바로 아래쪽에 소방서가 있음에도 코앞의 거리를 소방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화재가 날 경우 비치된 소화기를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역부족일뿐더러 응급환자 발생 시에도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낭비된 세비를 근거로 들어가며 이런 열악한 현장을 언론에 노출하는 게 ‘감성팔이’나 ‘쇼’라는 지적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 지역을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이자 숙원사업이었을 것이다.
만약 ‘쇼’를 해서라도 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면 그런 쇼라도 몇 번이고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런 ‘쇼’나 소통의 시도조차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데다, 어찌 됐든 박원순 시장 방문 이후로 삼양동에는 각종 편의시설이나 기반시설이 들어오게 됐다. 애초에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정치이고 행정이 아닌가. 과연 거기에 일상에서 마주치는 고통을 덜어주는 일 이상의 명목이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