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백 가지가 될 것 같다. 소설과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하루키의 소설은 특히 그렇다. 주목하는 포인트도 다르다. 주인공이 듣던 음악이나 먹던 음식, 타고 다니는 차, 읽던 책 등과 같이 사소해 보이는 것에 꽂힐 수도 있다. 주변부의 소품처럼 보이던 그런 것들이 이야기의 핵심이 될 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도서관이었다. 이 소설에서 도서관은 『기사단장 죽이기』의 구덩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때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소설에 등장하는 책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마의 산, 호밀밭의 파수꾼, 8월의 빛, 수레바퀴 아래서 등 주인공 와타나베가 읽고 주변과 교감했던 책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이런 대목은 와타나베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준다.
하나를 잡으면 몇 번이나 거듭 읽었고, 때로 눈을 감고 책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책 향기를 맡고 페이지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사단장 그림은 이 책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그림과 관련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동일본 대지진도 배경처럼 나온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구덩이도 등장하고, 이와 관련된 에도 시대의 괴담을 다룬 『이세의 인연』이라는 소설도 언급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무려 1,200쪽에 가까운 긴 이야기를 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소설은 극적인 사건보다 이런 소재와 모티프에 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무심코 툭툭 던지는 이야기들이 어디선가 하나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부의 이야기로 그칠 때도 있지만, 어떤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기도 한다. 책 속의 이런 대사는 책 속의 다른 인물이 아니라 마치 독자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전 누구나 인생에서 그렇게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포인트가 찾아오면 재빨리 그 꼬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쳐서는 안 돼요. 세상에는 그 포인트를 붙들 수 있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남녀의 관계’
물론 하루키 소설 대부분을 관통하는 ‘코드’도 있다. 예를 들면, 남녀의 만남과 ‘관계’. 『기사단장 죽이기』도 예외가 아니다. 하루키는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선에 천착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불분명한 경계선이야말로 삶의, 인생의 본질일 수 있다는 게 하루키의 철학인 것 같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그런 철학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대사와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대사처럼 말이다.
즉 우리 인생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는 말이죠. 그 경계선은 꼭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멋대로 이동하는 국경선처럼요. 그 움직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그 모호하고도 불분명한 경계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가 바로 남녀의 만남과 관계이다. 개연성도 없고, 필연성도 없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남녀의 만남은 대부분 ‘우연적’이다. 대신 관계(잠자리를 의미하는)는 필연적이다. 때로는 즉흥적이고 파괴적이며, 대부분은 탐미적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다소 불편하게 느낀다면 이런 요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남녀의 만남과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아내의 외도, 유부녀와의 잠자리. 너무 불편해하지는 말자. 앞서 말했듯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선을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몸을 섞는 것처럼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일이 또 있을까. 그것을 조금 과장되게, 자주 등장시킬 뿐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전의 소설에서도, 앞으로의 소설에서도 남녀의 관계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중요한 코드다. 이게 불편하면 하루키를 읽지 말아야 한다.
2. 등장인물을 보여주는 ‘자동차’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코드이자 포인트는 ‘자동차’다. 자동차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역시 하루키답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하루키는 그 사람이 읽은 책으로 캐릭터를 보여준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자동차는 그러한 책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루키는 자동차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외모, 상황을 보여준다. 자동차 브랜드와 모델, 색상은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주인공에게 그림을 의뢰한 멘시키는 은색 재규어를 탄다. 다시 말해 멘시키는 은색 재규어 같은 남자다. 주인공의 유부녀 애인은 빨간색 미니를 몬다. 다시 말해 유부녀 애인은 빨간색 미니 같은 여자다(미니는 왠지 애인에게 선물하고 싶은 차이기도 하다). 멘시키가 딸려 보낸 검은색 인피니티,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검은색 구형 볼보, 그리고 아키가와 마리에의 고모가 운전하는 파란색 도요타 프리우스도 그 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설명하는 장치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앞으로 은색 재규어를 만나면 멘시키를, 빨간색 미니를 만나면 유부녀 애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주인공 ‘나’를 설명하는 차는 도요타 코롤라 왜건과 빨간색 푸조 205 해치백이다. 코롤라 왜건은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 차’이고, 빨간색 고물 푸조는 아내에게 이혼 통보를 받은 뒤 주인공이 여행할 때 탔던 차다. 성능도 좋지 않고, 언젠가 멈춰버릴 듯한 이 차는 주인공 ‘나’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3. 『위대한 개츠비』의 오마주, ‘멘시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가장 눈여겨볼 인물은 멘시키다. 그는 물론 이야기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주인공 ‘나’의 일상은 멘시키를 만나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이런 멘시키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연상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그녀가 보이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면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매주 성대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 말이다.
실제로 하루키는 『위대한 개츠비』의 열혈 팬이다. 직접 번역 작업도 했고,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이 소설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기사단장 죽이기』가 『위대한 개츠비』와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한 오마주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멘시키는 개츠비처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힘으로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딱히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굳이 행복해지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진실에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멘시키는 흔들린다. 작은 빈틈도 보이지 않던 그에게 숭숭 뚫린 구멍이 나타난다.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그림을 원하고 구덩이를 파헤쳤지만, 자신이 찾던 그 진실로부터 끝끝내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멘시키는 행복해질 수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 ‘나’는 멘시키와 산장에서 벌어진 비현실적 사건, 그림 기사단장에 얽힌 비밀 등을 접하며 진실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그 태도는 바로 ‘그냥 그대로 두는 것’과 ‘믿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계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인다. 우리가 오늘 겪고 부딪히고 만나는 일은 대부분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1권의 부제 ‘현현하는 이데아’, 2권의 부제 ‘전이하는 메타포’는 그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바꾸려고 한다. 바꿀 수 있기를 애타게 소망한다. 그러지 못하면 불행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될까?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좌절감, 상실감, 고독감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주인공은 임신한 아내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지 몰라.”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 말과는 거꾸로 살아왔던 것 같다. “이 세계는 확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믿을 것은 그리 많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의지대로 된 일이 그리 많지 않건만, 이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중요한 건 ‘바꾸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지금도 잘 모른다).
확실한 진실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믿지 못한 멘시키, 확실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국 믿기로 한 주인공 ‘나’, 둘 중에 누가 더 행복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우열을 가리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저마다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안고서” 말이다. 우리 인생은, 삶은 잘 설명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이 많은 법이다. 짧은 이 문장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요.”
PS.
SNS를 보니 많은 사람들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있더군요. ‘사놓기만 하고 읽지 못하고 있다’는 분도 많고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요. 언제든지, 아무 곳에서나, 그러고 싶을 때, 천천히 읽는 게 하루키의 소설이니까요.
책을 덮으면서 크로키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은 분 중에 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어떤 친구 분이 인스타그램에 이런 댓글을 달았는데 많이 공감했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루키의 글은 사람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니 말입니다.”
원문: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