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의 갈등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2~30대의 성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나오는 것이 부모와의 갈등이다. 여사친들의 이야기를 듣자하면 옷차림부터 외모, 남자친구에까지 관여를 한다. 옷은 왜 그런 걸 입냐 하고, 몸매 관리 좀 하라고 간섭하기도 하고 남자친구에 대해서 험담을 하고, 결혼은 언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간섭한다.
남자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잠자는 시간에서부터 옷차림새와 머리 스타일, 취미 생활, 결혼에까지 관여한다. 또, 남녀불문하고 집에서 좀 뒹굴라치면 그 꼴을 쳐다보질 못한다.
“어디 제발 좀 나가라!”
부모들의 고정 멘트다. 여기에 자식들은 답한다.
“어딜 가라고?”
“아무 데나! 방구석에 처박혀있지 말고!”
함께 살지 않으면 갈등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따로 거주할 때 부모와의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혼을 한 친구 하나는 대기업에서 이직을 하는 문제 때문에 현재 부모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미 좋은 회사를 다니고 있고 그 회사에서 오래 있으면 더 좋은 자리에 올라가게 될 텐데 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봐야 할 건, 부모의 말이 맞고 틀리느냐가 아니라 부모들이 자식들의 삶에 관여하고 있는 한국적 현상이다.
부모자식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과정
부모와의 갈등은 대체로 부모의 간섭에서 시작된다. 자식들이 먼저 부모에게 어떤 말을 하며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보다는 자식이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부모가 코멘트를 하고, 그 코멘트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간섭’과 ‘그냥 하는 말’간에 합의가 되어있지 않기도 하다. 부모는 간섭이라 생각하지 않고 어떤 말을 내뱉는데, 자식들은 그것을 간섭으로 받는다. 아래를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어떻게 시작되고 심화되는지를 살펴보자.
① 자식이 어떤 옷을 입는다 → ② 그 옷에 대해 부모가 간섭을 한다. “다른 걸 좀 입고 다녀라.” → ③ 자식은 못들은 체 하거나 간섭 좀 하지 말라고 대답한다 → ④ 부모가 말한다. “무서워서 너한텐 무슨 말을 못 하겠다. 넌 애가 왜 그렇게 유별나니? 다른 집 애들은 안 그래.”
자식이 특정 옷을 입는 행위는 부모와 아주 무관하다. 설령 그것이 찢어진 망사스타킹에 가죽 자캣이라도, 설령 그것이 유행 지난 ‘청청’이라 할지라도 자식의 옷차림과 부모의 인생은 크게 관련이 없다.
하지만 부모들은 개입하고 싶어한다. 자식이 이상한 옷을 입거나 이상한 조합의 옷을 입거나, 매일같이 같은 옷을 입으면 개입한다. 왜 그런 옷을 입냐고 코멘트를 하고,더 나아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게끔 종용하기도 한다.
부모의 간섭은 사랑인가?
보통 부모들의 간섭은 사랑으로 여겨진다. 실제 많은 부모들은 자식의 행위에 대해 이런저런 코멘트를 날리는 행위를 사랑이라 생각한다. “내 자식이 아니면 이렇게 말도 안 해준다.”라는 흔한 고정 멘트는 부모들들의 간섭 행위의 근간을 잘 설명해준다. 물론 어떤 자식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지금의 모습을 존중해주지 않는 부모들의 간섭을 두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아마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이나 『아직 가야할 길』을 슨 스캇펙 역시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할 것 같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부모들의 그런 코멘트 역시 일종의 사랑의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점, 상대에게는 사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랑은 결코 일방적인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 스토커의 사랑이 설사 진실한 무엇이라 할지라도 받는 쪽의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다. 폭력적인 꼴통마초가 여성을 애인이나 와이프로 두고 사랑하는 방식도 마초의 입장에선 사랑일 수 있지만, 받는 쪽에서 그것을 사랑으로 느낄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사랑이란 행위는 받는 쪽에서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주는 쪽에서 사랑이라고 넘겨줘도 받는 쪽에서 그것을 폭력으로 느낀다면 주는 쪽에선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사랑을 주는 방식은 아무래도 자식 쪽에서 폭력으로 간주되고는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부모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자식들이 생겨나고, ‘자식 챙겨줘 봐야 다 소용없다’라는 한풀이가 생겨난다.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사랑 방식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은 정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부모의 백업이 없으면 자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자식들이 태어나는 순간 부모들은 군비 경쟁에 돌입한다. 다른 집안의 자식들이 영어 학원을 다니면 왠지 내 자식도 왠지 영어 학원에 보내야 할 것만 같다. 보내지 않으면 내 자식이 경쟁에서 탈락하게 될 테니까.
유아기 때부터 시작하는 군비 경쟁은 대학을 갈 때까지’도’ 계속된다. 부모들은 자식을 더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보내려 한다. 맹자 엄마도 그랬다면서 가족을 특정 학군에 편입시키기도 하고, 위장 전입도 불사한다. 가장 역할을 맡는 아빠는 자식과 엄마를 해외로 보내고 물주 역할을 하며 생이별을 하기도 한다. 자식을 더 경쟁력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다.
부모들이 더 좋은 중학교와 더 좋은 고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려는 이유도 그럴듯하다. 부모가 마냥 자식들을 자유롭게 놔둔다면 더 좋은 고등학교에 이르게 해주는 더 좋은 중학교에 자식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더 좋은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좋은 직장을 얻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직장 외에 더 나은 길이 한국에 이렇다 하게 마련되어있지 않기에 부모들의 이런 걱정은 타당하다. 부모들 간의 군비 경쟁에서 탈락한다면 내 자식의 삶이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을 것이다. 중산층에선 자사고나 특목고 정도 보내는 선에서 경쟁이 이루어지지만, 더 여유 있는 부모들은 조선에 있는 학교에 만족하지 못하기에 미국으로 자식을 보내서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게 한다.
많은 자들이 한국의 교육열 강한 부모들을 언급하며 ‘자식으로 자아 실현하려 한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도 있기도 할 것이나,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에서 이 모든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을 악마화하는 식의 주장이 시원할 수는 있으나 세상은 좋은 놈과 나쁜 놈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법이다.
자식을 존중하는 능력이 상실된 부모들
하지만 비극이 발생한다. 부모들은 비단 자식의 교육에만 관여하지 않는다. 자식의 거의 모든 것에 관여하려 한다.
자식이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관성은 자식의 머리 사이즈가 커져도 변치 않는다. 결과적으로 부모들은 자식에게도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식들은 당연히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말에 따라야 자식이 행복할 거라는 환상에 도취한다. 이런 부모들이 수면 아래에 잠재되어있다가 매스컴에 급부상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영화 <위플래쉬>와 <사도>가 개봉했을 때다.
한국 부모들은 <위플래쉬>를 찬양했다. 애를 때리고 욕하는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결국 훌륭한 드러머가 탄생되었다는 식으로 <위플래쉬>를 해석했다. 그들은 <위플래쉬>를 보며 자신의 (폭력적인) 교육관이 역시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확인받았다.
<사도>에서 ‘부모’ 역할인 영조(송강호 연기)는 ‘자식’ 사도세자(유아인 연기)를 가차 없이 대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뒤주에 가둬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때 한국의 부모들은 영조에 감정이입을 하고 그가 할법한 행위를 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자식이 엇나가면 부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를 통해선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이다. 이런 부모들에게서 자라난 자식들은 부모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심지어 증오하기도 한다. 부모들이 “내 모든 걸 바쳐서 애를 키웠는데 다 부질없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즈음에는 소용이 없다.
자식들이 부모와 거리를 두려 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과제만을 껴안고 살아가게끔 종용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자신과 분리된 하나의 생명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날개를 달고 살아가게끔 내버려 두지 못하는 상황- 사회를 구성하는 엄연한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 이 상황에서 자식이 부모와 함께 공존하는 것은 어지간한 효력(!)과 (의지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사회의 잘못도 있다.
사회의 잘못만 있는 건 아니다.
원문: 박현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