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림을 못 그릴 줄 알았습니다. 손 근육에 힘이 빠져 붓은커녕 연필조차 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육병을 앓고 있는 요한이는 2년 전 ‘플레이그립’이라는 필기 보조기구를 사용하면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다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미술의 세계에선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요한이는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축구를 하며 운동장을 누볐습니다. 요한이 어머니 문윤희 씨는 “희망·용기·자신감 회복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4월에는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 50여 명과 그림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한 때 무용수를 꿈꿨던 김형희 씨는 25년 전 교통사고로 졸지에 전신 마비 환자가 됐습니다. 그는 사고의 상처를 딛고 재활 치료를 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손에 감각이 없는 그가 붓을 쥐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손에 붕대를 칭칭 감아 붓을 고정시키곤 했죠. 하지만 자꾸 떨어져 힘들었어요.”
어느 날 그의 전시회에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립플레이 이준상 대표입니다. 필기 보조기구를 보여주며 한 번 써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보조기구는 김 씨의 작품 세계에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큰 붓을 들기 힘들어 포기해야만 했던 대형 작품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경험과 재능을 살려 장애 아동들에게 그림 멘토를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에게 ‘쓰고 그리는’ 기쁨 선물
그립플레이는 3D 프린팅 기술로 필기 보조기구를 제작 판매하는 예비 사회적기업입니다. 근육병이나 척추 장애, 뇌병변 질환으로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구입니다.
필기 보조기구는 손바닥의 중앙에 끼워 쓰는 형태입니다. 이 보조기구에 연필이나 붓을 장착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식사보조기구나 타이핑 보조기구로도 변형이 가능합니다. 재질은 친환경 소재인 옥수수 전분을 활용해 만들었습니다.
2013년부터 ‘장애 아동 학습 보조기구 지원 법령’에 따라 장애 아동이 있는 학교는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의무적으로 장애 보조 기구를 구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필기 보조기구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해 왔습니다. 수십만 원이나 하지만 체형이 다르고 고장이나 파손 시 A/S 받기도 힘들어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립플레이는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해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했습니다. 3D 프린팅 기술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가가호호 방문해 스캐너로 손 모양과 치수를 측정해야 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측정이 가능합니다.
이 데이터를 토대로 디자이너는 측정값을 분석해 설계에 들어갑니다. 완성된 설계도 정보를 3D 프린터에 입력하면 얼마 후 제품이 완성됩니다. 상담부터 제품의 출력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주 내외입니다. 그립플레이는 이 같은 일련의 공정을 담은 플랫폼을 개발해 3D 프린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립플레이는 올해 초 전라남도 교육청과 협약을 맺고 원격 시스템으로 2건의 필기 보조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 한 쇼핑몰 업체로부터는 기업의 사회 공헌 프로젝트로 보조기구 제작을 의뢰하고 싶다는 제안도 받았습니다. 이런 혁신성과 품질을 인정받아 그립플레이는 설립 2년 만인 지난해 매출 1억 원을 달성했습니다.
2016년에는 보조기구가 장애인고용공단 건강보험 수가 지정 품목으로 등록됐습니다. 4대 보험에 가입된 근로 장애인들은 무상으로 제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향한 기술… 소외 계층에게 다양한 경험 제공
그립플레이는 기술의 힘으로 장애인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사회적 미션입니다.
“기술은 돈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쓰여야 합니다. 이전의 기술들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소득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들이 한정돼 사회 문제가 됐죠. 저희는 기술을 통해 소외 계층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이 특정 계층이 아니라 모두에게 골고루 퍼져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립플레이는 단순히 필기 보조기구를 제작해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수 학교와 재활 병원을 돌며 ‘찾아가는 스튜디오’라는 미술 수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미술 교육을 통해 성장기 아동들에게 꿈과 희망, 도전의 동기를 부여하고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이 대표는 “쓰거나 그릴 수 없다는 건 바로 교육의 격차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미술 교육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꿈, 희망, 도전의 동기를 부여하고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와 소통을 유도해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필기 보조기구 제작과 그림 수업은 기업의 후원이나 펀딩을 통해 저소득층 장애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지난해와 올해 250여 개의 보조 기구가 만들어졌고 그와 비슷한 숫자만큼 장애 아동들이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이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2차례 그림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전시회를 통해 그립플레이의 사회적 가치에 매력을 느껴 입사한 최윤정 그립플레이 디자이너는 필기보조기구를 만드는 매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 제가 만든 제품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는 분들을 만날 때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얼마 전 필기를 할 수 없어 시험을 포기했던 40대 남성분이 제가 설계한 보조기구를 끼고 시험에 도전해 1차에 합격했어요. 누군가 접어뒀던 꿈의 나래를 다시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최고의 매력입니다.”
혁신기술 정보 공유… 대자본 중심 탈피 지역사회 스스로 문제 해결
이준상 대표는 앞으로 보조기구 제작 방법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계획입니다. 장애인들이 개발 소스를 다운로드해서 자신이 필요한 제품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 외국에서는 의족과 의수를 만드는 기술을 이미 공개했습니다. 정보 공유를 통해 기술을 대기업이나 대자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 안에서 당면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입니다.”
조각을 전공한 이준상 대표가 그립플레이를 창업하게 된 계기는 학창 시절 게시판에 붙었던 한 장의 포스터에서 비롯됐습니다.
“장애인과 함께 떠나는 해외 탐방 여행이었어요. 지체 장애인 1분과 청각 장애인 2분과 팀을 꾸렸습니다. 준비하는 첫 단추부터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무심코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입구에 턱이 있어 휠체어를 탄 친구가 들어올 수 없었어요. 청각 장애인들과 이야기를 할 땐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해야 했습니다. 제가 몰랐던 세상이지요.”
그때 함께 여행한 것을 인연으로 이 대표는 졸업 후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에서 장애인 예술가들의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했습니다. 이때 맞춤형 필기구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3D 프린터 기술을 독학으로 익혔고 전문성을 더하기 위해 2015년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디자인 싱킹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만큼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가미한 디자인으로 일반인들도 써보고 싶도록 제품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필기 보조기구가 준 선물은 ‘희망’
이 대표는 한 사람의 꿈의 크기는 그가 경험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경험이 풍부할수록 보다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일 경험의 크기가 꿈의 크기를 결정한다면 장애가 있어도 돈이 없어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안돼” “난 할 수 없어”를 되풀이하던 요한이는 요즘 화가의 꿈을 꿉니다. 요한 어머니는 아들의 그림 중 행글라이더로 하늘을 나는 그림을 가장 좋아합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다 보니 볼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그 그림을 볼 때면 더 높은 곳에서 더 먼 곳까지 드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제 마음이 보이거든요.”
따뜻한 보조기구가 그려 가고 있는 세상은 ‘꿈’ 그리고 ‘희망’입니다.
원문: 이로운넷 / 필자: 백선기, 사진: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