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그것도 래퍼가 무슨 연기냐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랩스타와 무비스타는 전혀 다른 직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래퍼들은 배우로서의 커리어와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를 동시에 쌓아왔다. 이는 70~80년대 흑인들이 즐겨보던 블랙스플로테이션 영화에 유명한 디스코 뮤지션들이 출연하던 것이 이어진 나름의 전통(?)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가령 투팍은 <주스>(1992)나 <포에틱 저스티스>(1997) 등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했고, 스눕 독은 <무서운 영화 5>(2013) 등 각종 카메오 출연은 물론 <트레이닝 데이>(2001) 같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제는 배우로 더 많이 알려진 윌 스미스는 원래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라는 힙합 듀오로 데뷔한, 그래미를 4차례 수상한 래퍼였다.
그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흥행을 기록한, 최근까지도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 혹은 기억할만한 래퍼 다섯 명을 골라보았다.
1. 에미넴(Eminem)
- 대표작: <8마일>(2002)
사실 에미넴의 출연작은 단 한 편 뿐이다. 코미디 영화인 <디 인터뷰>(2014)나 닥터 드레와 스눕독 주연의 싸구려 코미디 영화 (2001)에 카메오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온전히 배우로서 출연한 작품은 <8마일>뿐이다. IMDb에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는 47편의 크레디트는 대부분 뮤직비디오나 다큐멘터리이다.
그럼에도 ‘연기하는 래퍼’를 떠올렸을 때 그를 선두에 꼽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8마일>이라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대단하다. 자신의 삶을 녹여낸 영화에 직접 주연을 맡아 연기하는 에미넴의 모습은, 연기의 테크닉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압도적이고 강력한 울림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동시에 그의 랩 퍼포먼스를 극장 스크린과 사운드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 된다.
사실 <8마일> 이외에도 몇몇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무산되었다고 한다. 에미넴의 출연이 무산된 영화로 알려진 영화는 거대한 프랜차이즈로 성장한 <분노의 질주>(2001)와 안톤 후쿠아의 복싱 영화 <사우스포>(2015)가 있다. 각각 폴 워커와 제이크 질렌할이 맡았어야 할 역할이 에미넴의 손을 쳤다고 알려져 있다.
2. 아이스 큐브(Ice Cube)
- 대표작: <보이즈 앤 후드>(1991) <프라이데이>(1995) <트리플 엑스 2 – 넥스트 레벨>(2005) <21 점프 스트리트>(2012)
이제는 그를 래퍼보다 배우로 보는 게 더 익숙하지 않을까? 1991년 <보이즈 앤 후드>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 아이스 큐브는 갱스터 랩을 창시했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 최고의 래퍼이며 뮤지션이었다.
1986년 N.W.A로 데뷔한 그는 ‘Straight Outta Compton’의 뮤직비디오를 직접 만드는 등 영상매체에도 관심을 보였었다. 존 싱글톤의 명작인 <보이즈 앤 후드> 이후, 직접 각본과 제작, 주연까지 맡은 코미디 영화 <프라이데이>로 성공을 맞보았고, <아나콘다>(1997), <쓰리 킹즈>(1999), <트리플 엑스 2 – 넥스트 레벨>(2005) 등 다양한 B급 장르 영화와 액션 영화에 출연했다. <우리 동네 이발소에 무슨 일이?>라는 요상한 국내 개봉명이 붙은 코미디 시리즈를 2002년부터 제작해 2016년 3편이 개봉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21 점프 스트리트>(2012), <라이드 어롱>(2014) 등 여러 코미디 영화에서 활약하고 있다. <라이드 어롱> 시리즈를 비롯해 N.W.A의 전기영화이자 그의 아들인 오셔 잭슨 주니어가 아이스 큐브를 직접 연기한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2015) 등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이제는 영화인이라는 명함이 어색하지 않은 아이스 큐브가 되었다. 올해 초 개봉한 <트리플 엑스 리턴즈>(2017)에 이어 <피스트 파이트>(2017) <라이드 어롱 3>(2018) 등의 차기작이 예정되어 있다.
3. 루다크리스(Ludacris)
- 대표작: <분노의 질주> 시리즈(2003~2017) <허슬 앤 플로우>(2005)
이제는 <분노의 질주>의 테즈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서던 랩의 대표주자인 루다크리스는 2003년 <분노의 질주 2>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그 이전에 몇몇 영화나 TV쇼에 단역이나 카메오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배역으로 데뷔한 것은 테즈라는 역할이 처음이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카메오 출연과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남은 영화는 대부분이 <분노의 질주> 시리즈이다. 그도 그럴 것이, 2편부터 시작해 <분노의 질주: 언 리미티드>(2011),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2013), <분노의 질주: 더 세븐>(2015),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2017)에 이르기까지 내리 4편의 시리즈에 연달아 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작품, 게임 원작의 영화 <맥스 페인>(2008)이나 독특한 설정의 영화 <게이머>(2009)에 출연한 경력이 있지만 대부분 저조한 흥행과 평단의 악평을 기록했기에 관객의 기억에 크게 남아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의 일원이라는 것과, 그 초기부터 함께했다는 사실은 배우로서 루다크리스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특히나 힙합팬이라면 한 번쯤 봤을 영화인 <허슬 앤 플로우>(2005)에서 악역 스키니 블랙을 연기하는 루다크리스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4. 50센트(50 Cent)
- 대표작: <겟 리치 오어 다이 트라인>(2005) <사우스포>(2015)
50센트의 배우 데뷔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에미넴과 비슷하다. <나의 왼발>(1989) 등의 짐 쉐리단이 연출을 맡은 <겟 리치 오어 다이 트라인>은 50센트의 이야기를 녹여낸 각본을 가지고 그가 직접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마약상이 될 수밖에 없던 길거리의 삶과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래퍼가 되려 한 주인공 마커스의 이야기는 실제로 마약상으로 일하다 총에 맞기도 한 50센트의 이야기와 닮았다. 대단한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아니지만 힙합 팬을 비롯한 매니아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50센트는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간다.
이후 50센트는 <데드 맨 러닝>(2009), <스트릿 오브 블러드>(2009) 등 저예산 액션 스릴러 영화에 주로 출연하고, <건>(2010)이라는 작품에서는 직접 각본을 쓰기도 한다. 브루스 윌리스, 실버스타 스탤론, 제이슨 스태덤 등 액션 스타들과 함께 출연하는 작품들이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여전히 <이스케이프 플랜>(2013) 등의 액션 영화에 출연하거나 <라스트 베가스>(2013), <스파이>(2014) 등의 영화에선 본인으로 출연하며 감초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나름의 악역으로 출연한 <사우스포>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차기작으로는 실버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함께하는 <이스케이프 플랜 2>(2018)와 제라드 버틀러 등이 출연하는 범죄영화 <Den of Thieves>(2018) 등이 있다.
5. 커먼(Common)
- 대표작: <원티드>(2008) <셀마>(2014) <존 윅: 리로드>(2017)
컨셔스 랩의 대표주자이자 시카고를 대표하는 래퍼인 커먼은 자신의 음악 성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틴 루터 킹의 셀마 행진을 다룬 에바 두버네이 감독의 영화 <셀마>에서는 청년들을 인도하는 인물로, <우리 동네 이발소의 무슨 일이 3>(2016)에서는 지조 있는 모습의 이발사로 등장한다. 동시에 <런 올 나이트>(2015)나 <존 윅: 리로드>에서는 킬러로,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2015) 등에서는 경찰로 등장한다. 얼굴에 타투를 가득한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속 커먼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을 것이다.
국내 미개봉작이지만, 농구선수로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저스트 라이트>(2010)이나 서부극이었던 Tv시리즈 <헬 온 휠즈>(2011~2016),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 <러브>(2012) 등의 영화 속 커먼의 모습은 작품마다 색다른 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고정된 이미지 없이 다양한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수행하는 커먼의 연기는 이제 배우라는 명칭이 손색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존 레전드와 함께 부른 <셀마>의 주제가 ‘Glory’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문: 동구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