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8년, 미국에서 2년 정도 일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개인적으로는 훗날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기억해내는 데 도움 주고자 하며,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한 번쯤 고민해보는 사람들에게도 작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미리 주지하고 싶은 것은 어느 한쪽이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개인의 목적과 상황,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필자의 개인적인 호불호에 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피하도록 하겠다.
8~5제, 9~6제 또는 플렉시블 타임제 vs. None
가장 먼저 출퇴근 시간을 비교한다. 한국에서는 출퇴근 시스템을 ‘근태’라고도 한다. 내가 일했던 회사에서는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저녁 5시에 퇴근하는 8~5제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9~6제도 사용해보다가 아무래도 디자이너 조직이다 보니 근태 시스템도 디자이너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인적인 용무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는 차원에서 플렉시블 타임(Flexible Time)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플렉시블 타임제는 출근을 오후 12시 전까지만 하면 출근 시간 기준으로 8시간을 근무한 뒤 퇴근할 수 있는 제도다. 초기에는 획기적이라 하여 매스컴에도 몇 번 기사화되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플렉시블’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최소 8시간을 채워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고 10시간이 넘는다고 해서 누가 말릴 사람은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와 주변 사람들이 다니는 실리콘밸리의 IT분야에 한정 지어서 이야기하자면, 물론 어느 회사 어느 직종에 일하는지에 따라 경우가 다 다르겠지만 미국에는 딱히 근태 시스템이라는 것이 없다. 본인의 일이 많으면 일찍 와서 늦게 갈 것이고, 본인의 일이 없으면 적당히 왔다가 적당히 일찍 퇴근한다. 신기한 건 아침 7-8시에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많은데, 아무리 늦게 출근해도 6시 이후까지 남아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태 시스템도 없고 알아서 왔다가 적당히 퇴근하면 되면 업무 강도는 어떨까. 야근도 없어 보이는데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는 좀 ‘널널’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는 출근해서 일하면 회의에도 여러 차례 참석하고 동료를 불러 커피 1잔 하러 가거나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 등 업무 시간 외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늦게까지 남아서 야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이유로 절대적인 업무량이 많은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렇듯 충분히 제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들이었는데도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이런저런 이유로 확보하지 못해서 야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늦게까지 일하고 고생하다 보니 동료들과의 관계도 끈끈해지고 흔한 말로 ‘사람을 얻는’ 일은 많다.
이곳에서는 일단 사무실에 앉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회의도 며칠 전에 나에게 공지된 것이 아니라면 오늘 새롭게 추가되는 회의는 거의 없다. 커피를 회사 안에서 뽑아먹으니 어디 나갈 일도 없고…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으니 어디 가서 시간 낭비 말고 여기서 해결하고 일해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회사에 설치된 여러 복지환경이 좋은 것은 다 그런 이유다. 점심시간, 이따금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 일하는 시간이 보장된다.
그럼에도 못 끝내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밤늦게까지 끝내려고 혼자서 끙끙대기보다는 매니저와 이야기해서 장·단기적으로 업무량을 조절해본다든가, 업무를 도울 수 있는 인력을 찾아본다든가 한다. 이마저도 여유 인력이 여의치 않으면 야근하는데 대부분 노트북을 사용하므로 회사서 남아서 하기보다는 집에 가져와서 한다.
회사에 남아서 일하는 것은 ‘기특하게 늦게까지 남아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는 업무시간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건가’ 또는 ‘오늘 늦게 출근했었나 보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아X존이나 우X 같은 몇몇 회사들은 한국 회사 이상으로 엄청나게 야근을 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저녁 시간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므로 혼자 늦게까지 회사에 있는 것은 이들 생각에는 좀 의아한 일이다.
다만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보니 회사 동료 관계는 아무래도 조금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나처럼 외국인으로 일하는 사람 중 결혼하지 않은 싱글의 경우 퇴근 후나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외로워하는 사람도 많다. 외로움이 무슨 대수냐-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겪어봐야 그 힘든 기분을 알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은 실리콘밸리보다는 즐길 거리가 많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대도시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재택근무 vs. WFH
한국에서 재택근무라 하면 임신 및 육아, 그 외 개인 사정에 따라 미리 신청하고 짧게는 몇 주간, 길게는 몇 달간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근태처럼 ‘재택근무’라는 시스템이 없고 그냥 ‘나 오늘 집에서 일할 거야’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이메일 제목은 더욱 성의 없는 WFH(Working From Home). 이메일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성의가 있는 편이지 아무런 공지 없이 WFH 하는 젊은 친구가 많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자유로워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여태껏 누군가 자리에 없다고 딱히 불편한 적은 없었다. 필요한 회의가 미리 공지되어 있는데도 WFH 하는 경우는 없고, 하더라도 집에서 ‘진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 나오느냐 WFH 하느냐보다 업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어느 회사든 이윤 추구가 목적이듯 회사를 다니는 개인의 경우에는 회사가 벌어들이는 이익에 기여하기 위해 성과를 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나 모두가 성과를 위해서 달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은 아무래도 ‘팀’ 중심의 성과주의다. A, B라는 프로젝트가 있고 각 프로젝트에 3명씩 배정되었으며 전체 팀 매니저가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A 프로젝트는 망하고 B 프로젝트는 좋은 평가를 받으면 팀 전체 매니저는 망한 A를 책임져야 하는 동시에 성공한 B 프로젝트의 영광을 가진다. 실제 업무를 수행한 팀원들은 상대적으로 실패한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에서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동시에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영예도 직접적으로 받기는 어렵다(물론 실패는 팀원으로 돌리고 성공의 영광은 본인이 갖는 최악의 매니저도 적지 않게 보았다만…).
미국은 ‘개인’ 중심의 성과주의이다. 위의 같은 상황이라면 A 프로젝트를 진행한 PL(Project Lead)은 책임을 져야 하고 B 프로젝트를 진행한 PL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프로젝트마다 PL 본인이 성과와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하기에 일에 열정이 따라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업무 부담감도 상당하다. 전체 팀 매니저는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하기보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PL의 업무를 조율하는 업무를 한다. 팀 매니저에게는 프로젝트 자체보다는 좋은 PL을 여럿 키워내는 것이 큰 성과가 된다.
보안(Security)의 중요성: 예방 vs. 처벌, 그리고 생산성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 같은 회사 다니는 친구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만드는 최첨단 모바일 기기를 정작 우리는 사용해보지도 못한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 내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하지도 못했고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랜선(LAN)을 컴퓨터 뒤에 연결해야 했다. 그나마 사용했던 컴퓨터도 묵직한 데스크탑. 노트북, 특히 디자이너들이 많이 사용하는 맥북(MacBook)을 사용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회사의 보안정책 때문이었다.
컴퓨터에 설치된 보안 프로그램만 해도 4-5개, 그것 때문에 컴퓨터 성능이 저하되기 때문에 업무 생산성도 떨어진다. 일례로 내 컴퓨터에서 동료의 컴퓨터로 용량이 큰 파일 하나를 보내려면 회사 내 공유 폴더를 사용하거나 특정 경로를 통해서만 보낼 수 있었다. 외부인이 회사에 방문을 하면 미리 방문 신청하고 입구에서부터 에스코트 받아야 했고 퇴근 시 소지품은 보안 탐색기를 통해서 내보내야만 했다.
여기서는 딱히 그런 거 본 적이 없다. 구글 다니는 친구가 페이스북 가서 점심 먹는 정도로 외부인이 자유롭게 회사에 드나들고 보안 탐색기는 천장에 달린 CCTV 외에는 없는 듯하다. 당연히 무선 인터넷 환경에서 일하고 윈도우 PC든 맥북이든 본인의 업무 성격에 따라 사용한다. 업무 생산성도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기본적인 보안 프로그램은 설치하지만 일반 사용자가 설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보안에 철저하기 때문이고 여기는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한국은 보안 개념이 ‘예방’의 차원이라면 이곳에서는 ‘처벌’의 차원이다. 한국에서는 ‘회사 기밀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시스템’이 보안인 것이고, 여기서는 ‘기밀을 빼가는 사람이 다시는 업계에 발을 못 붙이도록 처벌하는 것’이 보안의 개념이다. 흥미로운 점은 처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방이 된다는 것이고,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시스템은 오히려 다수인 선의의 사람들에게 번거롭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여담이지만 비단 IT분야 뿐 아니라 미국의 법 문화 자체가 ‘처벌’의 스텐스가 강하다. 가령 한국은 과속을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과속방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만 미국에는 카메라가 없고 이따금 경찰관이 곳곳에 숨어있다. 말 그대로 운 나쁘게 걸리면 꽤 높은 액수의 벌금 및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기다린다.
의사결정 과정
의사결정 과정도 꽤 다르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직급에 따라 의견이 나뉘면 높은 직급의 의견으로 좀 더 기우는 경향이 강했고 승인받기 위해 높은 직급의 의견대로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잘 안 될 경우에도 책임은 높은 분들이 지게 될 테니까. 중간중간에 보고하는 시기도 리더의 결정에 따라 움직인다. 의사결정 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고 일의 속도가 빨라지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한번 결정된 내용도 더 위의 리더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일의 진행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겪었던 의사결정 과정은 리더의 의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은 끊임없는 비판과 논쟁, 설득의 연속이다. 작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옆 팀 사람들도 함께 참여해서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모습들은 흔히 보이고, 심지어 싸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지만 의사결정 후에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잘 지내기도 한다.
‘과장님’ ‘차장님’하고 부르는 문화가 아니라 CEO마저도 전부 서로 이름을 부르는 수평적인 구조라 아무래도 팀장급의 의견에 신입 인턴이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다. 누구라도 서로의 의견을 쉽게 나누고 논쟁하는 것이 주된 문화다 보니 한국에 비해서 일의 진행 속도는 더딘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결정된 것에 의견이 쉽게 뒤바뀌는 법은 없어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속도가 느리다고 할 수도 없다.
의사결정 과정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윗사람의 의견이나 동료의 의견대로만 따라가면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이 없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질문하고 나의 생각을 주장하며 논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동양인들에게는 분명 낯선 풍경이지만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틀을 벗는 노력을 해야 한다.
Project Assigned vs. Project Proposal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에는 매년 초 임원들, 그룹장, 파트장들이 함께 모여 프로젝트 계획을 세우고 각각의 프로젝트에 팀원을 알맞게 배정하는 시기가 있다. 기본적으로 큰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게 될 팀원들은 이 시기에 일정과 역할을 배정받는다.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 중에도 순간순간 소소한 과제들이 치고 들어 오는데 팀의 매니저가 일을 적당히 분배함으로써 팀 전체적으로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연초에 굵직한 프로젝트를 팀 매니저가 소개하고 몇몇 중요한 프로젝트에 팀원을 배정한다. 조금 다른 부분은 A 프로젝트가 B 프로젝트와 연계성이 보이면 하나의 큰 프로젝트로 묶고 함께 진행한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본인이 어떤 프로젝트를 너무 하고 싶은데 정작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프로젝트와 연관된 무언가를 ‘잘’ 만들어서 해내면 기회가 온다.
앞서 말했듯 개인 성과 위주의 업무 문화이기 때문에 본인이 잘 하는 부분을 어필하고 받아 들이면 원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반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중 기여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매니저에 의해서 가차 없이 다른 멤버로 교체되기도 한다. 물론 정해진 멤버만이 끌고 나가는 프로젝트도 있지만 꽤 많은 경우 이처럼 멤버들의 합류 또는 이탈이 유연하게 진행된다.
본인이 ‘이거 꼭 필요한 디자인 프로젝트일 것 같다’고 느끼면, 스스로 프로젝트 콘셉트를 잡고 디자인을 어느 정도 진행하여 주변 팀원들에게 공유한다. 인정을 받으면 ‘개인 과제’가 ‘팀 과제’로 바뀌고 본인이 프로젝트 리더가 되는 경우도 많다.
회의 문화
한국에서 일했을 때는 일단 회의가 기본적으로 길었다. 회의 시간이 긴 이유는 안건이 많기 때문이다. 서울, 수원, 광주에 흩어져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 모일 수는 없으니 주로 전화나 이메일로 소통하다가 긴급하게 결정 내려야 할 안건들을 몇 가지 모아두고 회의 시간에 몰아서 결정하는 때가 많았다. 다들 멀리서 오기 때문에 회의 시간에 조금씩 늦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안건을 공유하고 참석자들의 의견을 나누고 논쟁하다 보면 짧게는 1시간, 길게는 종일 회의했다.
회의는 보통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때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떤 회의가 있으면 회의록을 작성하는데 나왔던 내용을 단순히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한 자료로도 쓰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했다.
이곳에서는 회의가 짧다. 기본적으로 회의가 많지 않고 안건의 개수가 적다. 그야말로 결정할 것만 빨리 결정하고 흩어지는 방식. 평상시 전화보다 이메일로 소통하니 회의 안건도 미리 이메일로 공유하고 회의 시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다른 지역에 있거나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는 컨퍼런스 콜로 온라인 회의를 진행한다(덕분에 아무래도 잘 안 들리는 영어가 더 안 들린다).
보통은 30분 내외, 길면 1시간 정도 진행되는 회의는 꼭 참석해야 하는 사람(Required)과 참석하면 좋을 사람(Optional)으로 나뉘어 통보된다.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던 사람이 늦게 참석하거나 불참하는 것은 프로답지 않은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감한 이슈를 해결할 방안을 생각하려고 모이기보다는 이슈의 해결책을 각자 미리 생각해와서 어느 것이 더 좋은 방안인지 논쟁하는 시간이다. 모여서야 함께 생각하기 시작하는 회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회의록 문화는 따로 없다. 각자 결정된 내용 중 필요한 부분을 필요에 따라 기록해둔다.
이직 문화
한국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옮겼던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회사 동료들 몰래 조심스럽게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고 나중에 회사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어졌다지만 회사의 윗사람들은 아래 직원 중 누군가 이직이라도 하려 하면 마치 ‘평생 있어야 할 사람이 배반(?)하고 다른 곳에 간다’라는 식의 시선을 주기도 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는 축하받으면서 이직하지만 준비하는 과정만큼은 007을 방불케 하는 비밀 작전이다.
이곳에서는 회사 옮기는 일이 흔하다 보니 한국에서처럼 마지막까지 비밀스럽게 진행하거나 하진 않는 듯하다. 심지어 회사 내에서 팀을 옮기는 것보다 이직하는 편이 더 쉬운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직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여기저기 떠벌리는 사람은 없지만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린킨들(Linkedin)을 통해 가고 싶은 회사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채팅이나 전화하는 모습을 이따금 볼 수 있고, 프린터가 있는 곳에 가보면 출력해놓고 찾아가지 않은 이력서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도 자주 본다.
흔한 이직 프로세스 중 하나로 지원자의 신분과 평판을 확인하기 위해서 ‘현 직장 상사로부터의 추천서’나 ‘현 직장 상사의 연락처’를 요구받기도 한다. 나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처음에 굉장히 난감한 일이다. 이직은 몰래 진행하는 것인데 현 직장 상사에게서 추천서를 받으라니…
그런데 부탁하면 거의 흔쾌히 작성해주곤 한다. 아끼는 팀원이라서 보내주지 않으려고 추천서를 안 써주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끼는 팀원일수록 굉장히 정성스럽고 좋은 내용으로 채워주므로 평소 매니저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연봉
한국에서는 ‘신입사원 공채’라는 시스템이 있기에 내가 받을 연봉이 이미 정해져 있다. 매년의 성과와 쌓이는 연차에 따라 회사에서 정해놓은 연봉 테이블이 바뀌지만 실제로 직원이 연봉 협상할 여지는 없었다. 매해 초반 변경된 연봉 액수가 적힌 계약서에 서명하면 그 액수만큼 1년간 월급 및 보너스를 받는다. 경력 입사하는 경우 입사 전에 연봉 협상의 여지가 있지만 입사 후에는 역시 회사 측의 연봉 테이블을 따라간다.
이곳에서는 일단 일괄적인 ‘신입사원 공채’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연봉도 제각각이다. 신입이든 경력이든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HR과 연봉 협상을 진행한다. 연봉은 입사할 때 HR과 협상한 금액이 오퍼 레터(Offer Letter)에 적혀있는데 보통은 기본급(Base Salary)과 보너스로 이루어진다. 회사에 따라 주식을 주기도 하고 입사할 때만 주는 보너스(Signing Bonus)도 있다. 나라가 넓다 보니까 이직을 위해서 다른 주(State)에서 이사할 경우에는 초기 정착 비용(Relocation Fee)도 챙겨준다.
연봉 상승비율도 HR과 협상하기 나름인데, 보통 입사 후에는 기본급이 오르기보다는 보너스가 오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직급이 오를수록 연봉이 오르는 것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같은 직급으로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편이 연봉이 훨씬 더 많이 오른다. 그 때문에 실리콘밸리에서는 몇 년 근무하다가 이직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연봉 1~2억 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 액수는 한국에서의 1~2억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계산하기 편하도록 연봉 10만 달러, 한화로 약 1억 2,000만 원으로 계산해보자.
연방 세금, 주 세금, 소셜 텍스(Social Tax) 등을 납부하면 거의 35~40%가 세금으로 나간다(CA 기준). 2~3인 기준으로 침실 하나, 욕실 하나가 딸린 보통 수준의 집을 구하려면 월세가 2,300~2,700달러 정도고 매년 7~12%씩 상승한다. 단순히 세금과 월세만 제외하더라도 연봉 10만 달러 – 세금 4만 달러 – 월세 3만 달러 = 3만 달러가 실제 손에 쥐는 연봉이다. 이를 12개월로 나누면 2,500달러, 한화 약 400만 원이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이 동네는 차량이 없으면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자동차 할부금액이나 리스금액, 각종 보험비용을 제외하면 1달에 2,000달러도 안 되는 월급을 집에 가져온다. 연봉 10만 달러를 받아도 말이다.
원문: 히로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