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휴일 아침이면 배를 긁으며 아이유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스무 살도 안 된 저런 애 보면서 좋아하지 말고 나가서 여자나 만나라.”며 잔소리를 했지만, 나에게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조르지 않아도 소개팅은 꾸준히 들어왔고, 그렇게 한 달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너덧 번씩 새로운 이성을 만날 기회가 있었으니 사실 그렇게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인기 있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배도 나오고, 내 입으로 말하기 좀 뭣하지만, 얼굴도 남 지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상당히 업된, 사람들이 많은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계속 주도해가는 언변은 있었지만, 1대 1 상황에서는 오히려 조금 수줍어하는 결점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남자라 해도 이 나이쯤 되면 나를 먼저 좋아했던 듯한 여자 한 둘 정도는 만나봤을 법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그 비슷한 경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암흑의 학창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적지 않은 나이에 소개팅 자리는 계속 들어왔다.
스물아홉에 어느 정도 건실한 직장에, 별로 노는 것 좋아하지 않고 성실해 보이는 남자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내 친구나 선후배를 소개해주기 나쁘지 않았던 조건’이었던 셈이었다.
소개팅을 하기 전 사전 정보로 상대를 가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개팅에 나오는 여성분들은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두 살 연하에서 두 살 연상 사이었다. ‘내 나이면 20대 중반 만나도 아직 괜찮지 않아?’라고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그런 나잇대의 여성분이나 내가 막연히 꿈꾸는 이상형의 외모를 가진 분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은 마음에 드는 분이 나오긴 했다. 물론 그녀들 대부분은 나의 애프터 신청에 ‘좋은 분 만나세요~ㅎㅎ’ 따위의 답장을 보냈지만, 오히려 나는 몹쓸 희망을 가졌다.
괜찮은 분도 가끔 나오네. 뭐, 언젠가는 잘 되지 않을까?
때로는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성격이 좋고 말도 잘 통해서 서너 번 더 만나본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Feel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남을 먼저 끊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소개팅은 계속 들어올 터였고, 눈높이를 적당한 선에서 타협 짓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며 나 스스로 자위했다.
“스물아홉이면 아직 급한 나이는 아니잖아?”
서른을 넘기면서 친구들이 결혼하기 시작했다. 불꽃 같은 연애로 어쩌다가 아기가 먼저 들어선 친구들과 안정적으로 연애를 오래 했던 친구들이 제일 먼저 장가를 갔다. 후자의 경우는 연애에 공백 기간이 없어 소개팅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얘기는 달리 말하면 연애에 있어 자구책이 확실한 괜찮은 친구들은 소개팅 경기장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한편 나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나이가 서른둘, 서른셋이 되어도 여전히 소개팅을 달렸다. 남자로서는 결혼 적령기의 나이었으니 여전히 소개팅 상대로는 무난했을 것이다. 무절제하게 소개팅을 달리는 유형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눈을 쉽게 낮추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특히 외모에 대한 집착이 큰 친구들이 여기에 속했다. 마침 소개팅도 자주 들어오겠다, 계속 만나면 언젠가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리라 기대하는 심리로 소개팅을 계속하는 이들이었다. 주로 연애를 거의 해본 적 없이 이상형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한 친구들이 여기에 속했다.
둘째는 자아도취에 빠진 이들이었다. 연애 공백기가 크고 20대 때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 같은 친구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학교 다닐 때는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을 갖춘 친구들에 비해 연애에 자신감이 없었던 이들로, 사회에 진출해 적당히 좋은 직장을 갖추고 주머니에 돈도 조금 생기면서 뒤늦게 자신감을 만끽하려는 친구들이었다. 그렇다고 클럽에서 꼬실 자신은 없고.
소개팅을 주선하려는 입장에서 볼 때, 첫째 유형보다는 둘째 유형이 훨씬 더 무난하다. 첫째 유형은 소개팅 전 단계에서부터 고르고 재며 소개팅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두 번째 유형은 일단 소개팅에 대한 장벽이 높지 않고 소개팅에 나서도 대부분 매너 있게 행동하기 때문에 평가가 좋은 편이다.
하지만 둘째 유형 역시 이러한 ‘소개팅 홍수’를 즐기는 와중에 “뭐 언젠가는 오늘 나온 걔보다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 심리로 진지하게 임하지 않기 때문에 첫째 유형보다 둘째 유형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더 좋은 조건의 이성을 찾는 것을 비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눈은 얼마든지 높을 수 있고, 개인의 기호이자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만 명심하자. 스물아홉에 많은 소개팅을 하며 저녁 시간을 허비하던 시절, 나오는 여성 분들의 조건과 나이, 외모는 크게 편차가 없었다. 달리 말하면, 소개팅 주선자는 어디까지나 당신 분수에 어울리는 이성을 소개해 줄 뿐, 당신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질 만한 이상형의 연락처를 선뜻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개팅해준다는 친구의 카톡 목록에서 우연히 괜찮은 이성을 발견했는데, 해달라고 졸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결해주지 않는다면, 그는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당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 자신을 알라
3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금요일 저녁마다 소개팅을 잡으며 눈만 높여가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당신은 이제 회사에서 과장급이고, 차를 가지고 있고, 오피스텔도 있을 수 있겠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당신은 예전보다 더 괜찮은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아직도 20대 후반의 미모의 여성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당신보다 어리고 센스 있고 잘 생긴 남자 중에 당신 정도의 벌이와 조건을 갖춘 이들은 얼마든 있다.
어차피 큰 기대하지 않은 자리에 나가 하루 저녁 어설픈 나쁜 남자 행세를 하며 허세를 떨고, 또다시 다음 소개팅을 잡는 일을 반복할 거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공부하고, 운동을 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 만약 상대에 대해 정말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면,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이가 당신의 소개팅 테이블에 나올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