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춘천’ 하면 가장 먼저 닭갈비를 떠올립니다. 남이섬, 경춘선 등의 ‘청춘의 메카’도 유명하지만 제 머릿속은 닭갈비가 우선입니다. 항상 배가 고프기 때문일까요? 사실 춘천이 닭갈비의 도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복학생’ 때문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춘천은 호반(호숫가)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춘천에는 소양강과 북한강에 의암호, 춘천호와 3개의 댐(소양강댐, 춘천댐, 의암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과 호수가 많다는 것은 즉, 놀기 좋다는 것을 뜻합니다. 옛 선조들도 물이 있는 곳에서 놀기를 좋아했죠(그렇게 통일 신라가 망했죠).
게다가 춘천은 서울에서 가깝고 교통도 편리합니다. 그래서 수도권 대학들의 주요 MT 장소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경춘선 노선은 북한강을 끼고 달렸기 때문에 창밖의 풍경도 아름다웠습니다.
경춘선의 옛 출발역이었던 청량리역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쉽고, 근처(롯데백화점)에서 장을 볼 수도 있었죠. 이런저런 이유로 주말에 떠나는 경춘선행 기차는 항상 일찍 매진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경춘선인 ITX-청춘도 주말에는 100% 매진이라고.
놀다 보면 배가 고픕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을 먹어야겠죠. 그런데 학생들의 지갑은 그리 두껍지 않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배를 채울만한 음식을 찾게 됩니다. 그때 복학생 선배가 말합니다.
“싸고 맛있는 거? 그러면 닭갈비 먹어야지.”
닭갈비는 1960년대 말 강원도 춘천 요선동의 한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숯불에 닭의 갈비를 구워 먹은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닭갈비는 ‘대’라는 단위를 사용하는데요. 1대는 닭가슴 반 짝을 발랐을 때 나오는 분량을 뜻합니다. 오늘날 닭갈빗집의 1인분은 보통 철판이 2대, 숯불이 3대입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청소년용 버스 회수권 1매가 100원, 가나 초콜릿이 200원 정도였으니 닭갈비 가격도 1대당 100원이었습니다. 저렴하고 양이 많아 춘천 일대의 군 장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이후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 선배들이 군 생활 때 먹었던 닭갈비를 떠올리고 소개하게 된 것이죠.
가격이 저렴한 것은 계륵이라 불릴 정도로 살이 없고,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배를 채우기 위해 채소를 같이 넣은 것입니다. 그 외에 1970년대 당시 춘천에는 양계 농가가 많아 공급이 넘치는 상황이었죠. 지금도 춘천시 남면, 신동면, 동내면에는 양계장이 많습니다.
수도권에서 유명하던 춘천의 닭갈비는 80년대에 이르러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경쟁이 심해지면서 80년대 후반부터는 기존의 숯불 방식에서 넓은 철판에 떡, 채소, 닭고기를 매운 양념으로 볶아 먹는 형식으로 조리 형태가 바뀝니다. 조금 남은 양념에 밥을 볶으면 ‘또’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조리 형태로 보면 닭불고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닭갈비’가 되었을까요? 이것은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에도 소갈비는 엄청난 고급 음식이었습니다. 1년에 1번 먹기도 쉽지가 않았죠.
그런 이유로! 소갈비를 먹고는 싶지만 돈이 없다. 뭐 소고기나 닭고기나 같은 고기니까? 이름에라도 갈비를 붙이자~ 라는 사람들의 욕구가 ‘닭갈비’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고등어 양념구이가 고갈비로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정리하자면 MT의 메카로 떠오르던 시절 춘천 근처에서 군 생활을 했던 복학생들이 후배들에게 가성비 음식으로 닭갈비를 추천하면서 춘천이 닭갈비의 도시로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춘천에서 제대로 된 닭갈비를 먹고자 한다면 역 주변에서는 남춘천여중 쪽의 닭갈비 골목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후평동 쪽의 닭갈비 골목과 강원대학교 후문은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고 하니 춘천에 가게 되면 참고하세요.
원문: 용진욱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