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대놓고 부딪혀 싸우게 되는 경우뿐 아니라, 딱히 얽힌 것이 아니어도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으로 모르는 이들과 소통하는 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를 요즘이라면 더 그렇다.
직접 봐서 이야기해도 모를 것이면서 텍스트로 상대를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반대로 상대의 텍스트 속 반응이 좋으면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기라도 한 듯 피상적인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지평을 넓히고 깊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고 ‘친구’로 여기지 못할까?
그것은 용기를 잃은 우리가 ‘인생의 과제’에서 도피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굴 적으로 보고 있지 않은데? 라며 내 이야긴 아닌가 보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이라는 게 정말 싸워서 이겨야 하는 상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상대를 대할 때 내 안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적이다.
누군가를 웃는 얼굴로 대하지만 속에선 열등감과 함께 질투심이 생긴다면, 나는 그에게서 보는 투사된 내 감정과 싸우는 중이다. 누군가에 공감하며 돕는다지만, 그를 통해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건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친구’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묘사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 보인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 시야로만’ 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린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에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즉, ‘친구’가 아니라 ‘적’으로 본다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놓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동반자로서 주고받으며 배우는 관계로, 공동체적 연결감을 느끼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친구’겠지만, 내 편의대로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인 것처럼 내 입맛에 맞는 부분까지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거부하는 관계는 ‘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친구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적이라면, 그의 관계는 공허하다. 친구라 해서 같이 놀러 다니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순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소통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본다면 그들은 ‘친구’로서 존재한다.
서두가 길었는데, 친구와 적의 개념을 내 언어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유는, 아들러가 말하는 ‘인생의 과제’ 세 가지가 모두 <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영역에서의 관계와 유대를 경험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이며, 인간은 이 과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어느 한쪽이 어그러지면 그 조화가 깨지며, 그 상태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아들러가 이야기한 인생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 일의 과제
- 교우의 과제
- 사랑의 과제
세 과제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는 자기 직업을 갖고, 친구를 사귀고, 진짜 사랑을 찾으라는 건가? 했는데,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 과제를 살펴보면서 내가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에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1. 일의 과제
직업적인 일이건 아니건, 혼자서만 하는 일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혼자 재택근무를 한다는 프리랜서도, 자기 작품을 보는 독자는 물론 이를 발행하고 판매하는 담당자와 연결이 있어야 한다.
관계 속에서 우린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일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엔 일의 과제를 회피하게 된다. 즉, 남의 평가가 두렵고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아서 아예 나서지 않게 된다.
그런 이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자존감에 상처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한정된 모습(특히 좋은 피드백을 받을만한 안전한 것)을 보이고 좋은 반응을 받으면서 안전함 속에 머무르려 한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냉철한 평가를 받는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힘들어하고, 일의 과제를 회피하게 된다.
결국, 이 과제의 본질은 ‘타인 앞에서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있을 수 있는가’다.
2. 교우의 과제
친구가 많으냐 적으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다. 우린 흔히 SNS에서 자주 소통하거나 오프라인에서 자주 보면 친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노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대도 나도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존중하며 편하게 있을 수 있다면, 그 관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이어진다면 그것은 친구이지만, 내 모습을 가장해야 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거나 속에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든다면 그건 적이다.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은 ‘나를 바꾸는 심리학’이기에, 교우 관계에서 내가 먼저 관점을 달리하여 다가가는 것을 과제 수행으로 본다. 자기 성장을 위한 실천적 수행과도 같다. 우린 대개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핑계를 댄다. 저 사람이 이렇고 저렇다며 그의 단점을 들어 남 탓을 한다.
그렇다고 자학하며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남을 탓하는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면 진실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남 탓을 한다는 건 미성숙한 자아가 계속 투사를 해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삶의 과제 수행은커녕 괴로움만 늘어날 뿐이다.
이 과제의 본질은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다.
3. 사랑의 과제
연인관계와 가족 관계가 여기 포함된다. 세 가지 인생의 과제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한다. 하긴, 능숙하게 심리상담을 한다는 사람들도 정작 자기 가족 앞에선 무력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가까운 사람들에겐 기대하는 바가 큰 만큼 나 먼저 변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나 역시 ‘가족한테도 그렇게 못하면서 무슨 공감이고 치료냐..’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스스로 가식적인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나 역시 현재 이 과제의 장에 놓여 있고, 정말로 어렵지만 조금씩 진전 중이다.
사랑의 과제에서의 핵심은 <자유>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정해진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낼 수 있으면서도 있는 그대로 인정받기 어려운 관계이기도 하다. 상대를 구속하고, 긴장케 하는 관계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구속은 결국 상대를 내 입맛에 맞게 길들여 지배하려는 것이고, 불신이다. 수용하는 사랑과 거리가 멀다. 진짜 사랑은 평온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관심이 넘친다. 자유롭게 둔다며 방치하지도 않고, 관심을 쏟는다며 구속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기대상’으로 삼기 쉽다. 자기대상은 말 그대로 self-object로, 대상이긴 한데 자기인 양 생각해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하리라 기대’하는 관계다.
자기중심적이고 유아적인 관계로, 대부분의 가까운 부부, 연인은 자기대상이다. 그래서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애적 분노가 일어나 소위 ‘별것 아닌 일에도 화나는 상태’가 되고, 싸움으로 이어진다. 극도의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자식을 대하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보지 못하고 구속하여 통제하려고 하기에 많은 문제가 일어난다. 부모 먼저 달라져서 다가가겠다고 생각하기보단, 아이를 교육하여 부모 생각에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습에 맞추려고 한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류의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부모가 문제다. 부모가 달라져야 아이가 달라진다. 아이의 상태를 보고 ‘뭘 해야 얘가 좀 달라질까?’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아이가 안정감을 느낄까?’를 먼저 떠올리는 게 사랑이다.
모든 아이의 문제는 안정감이 결여된 것에서 온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안정감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며, 그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온전히 수용하고 욕구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버릇 없어질까 봐’라는 것은 부모의 불안이다. 아들러는 아이의 문제 행동조차 ‘부모가 있는 그대로의 자길 봐주지 않기에 튀어서라도 관심을 받고 싶은 목적’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문제행동이 인정욕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제의 본질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가’다.
- 일의 과제- 타인 앞에서 당당하기
- 교우의 과제- 진실된 관계 맺기
- 사랑의 과제-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수용하기
위의 세 인생 과제가 버겁게 느껴져서 회피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싫어하게’ 된다. 상대에게 이유가 있어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싫어해야 해서 싫어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 인간관계에 들어서는 게 두려워서 싫어하는 것이고, 상대는 마침 그 구색에 맞을 뿐이다.
일의 세계에 뛰어들어 평가받을 자신이 없어서 ‘나는 일과 안 맞아, 조직 생활에 쩔은 인간들 답답하고 별로야’라고 한다. 깊은 교우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 ‘뒷말이나 하고 비교나 하는 동네 엄마들 모임 따위 싫어’라고 한다.
상처를 준 부모를 다시 대하기 두려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부모가 어릴 때 나한테 이러저러하게 했기 때문이야’라며 다가가기를 꺼린다. 싫은 것 뒤엔 두려움과 회피가 있으며, 아들러는 이것을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다.
나 역시 거짓말을 해왔고, 하는 중이다. 내 에고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거짓 감정을 만들고 핑계를 대는 것이 보인다. 쉬우면 인생의 과제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었겠나 싶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진실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내보이고, 또 상대도 나에게 기꺼이 그럴 수 있는 관계 속에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 잘 산 것이 아닐까.
공동체적 연결감, 그 속에서의 나, 그리고 너, 의식 속에만 있는 게 아닌 실제로 주고받음이 이루어지는 관계. 적이 아니라 친구인 관계. 이것이야말로 인생 과제라 할 만하다.
원문: 율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