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혈기 왕성한 시절에는 그랬었다. 유명하다는 곳은 무조건 가고, 이름난 곳에서 밥을 먹고, 핫스팟에 가서 최신 유행을 만끽해야 그게 여행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항공사 마일리지가 쌓이고, 여권에 찍힌 도장의 개수가 많아지니 달라지는 게 많았다. 여행의 취향이 생긴 거다. 정확히는 여행지를 선택하고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야 있겠지만, 세계 어디나 대도시는 비슷비슷하다. 사람 많고, 복잡하고, 글로벌 브랜드들의 간판이 경쟁하듯 늘어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공장에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대도시보다는 아기자기하고 개성 강한 중소도시를 구석구석 둘러보는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여행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중소도시 여행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된 건 프랑스 남동쪽의 작은 도시, <안시 Annecy> 여행을 하면서부터였다. 10여 년 전 런던에서 유학 중인 친구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 인생 최초로 유럽 땅을 밟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후, 귀국 전까지 남은 5일의 시간을 프랑스 여행을 하기로 했다. 반도의 흔한 20대 아가씨들이 그랬던 것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리’가 무조건 1순위였다. 하지만 파리만 가기 아까우니까 영화제 때문에 이름을 몇 번 들어 본 ‘니스’를 찍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런데 프랑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지도를 살펴보다가 한 도시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매년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도시 ‘안시 Annecy’. 몇 해 전, 평창과 2018년 동계 올림픽 최종 후보로 경쟁했던 도시로 한국 사람들에게 좀 더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별 정보도 없었고, 내가 여행 똥멍충이 시절이라 프랑스는 뭐,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크겠지 하는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했다. 거리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실제로는 프랑스는 남한 면적의 약 6배 크기) 그래서 반나절 정도 안시에서 들렀다가 니스로 내려가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계획이다.
크리스마스를 런던에서 잘 보내고 기대에 차 파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현실의 파리는 상상과 많이 달랐다. 겨우 3일이었을 뿐인데도 하루빨리 파리를 떠나고 싶었다. 시크하다 못해 서늘한 파리지앵, 여기저기 널린 지뢰 같던 개똥, 내 지갑을 노리고 있는 것 같은 서슬 퍼런 눈빛의 소매치기들, 무엇보다 뼛속까지 시린 파리의 겨울 날씨가 날 지치게 했다. 도망치듯 파리를 떠나 별 기대 없이 안시에 도착했을 때, 나와 일행을 제일 먼저 맞아 준 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기차 예약 문제로 반나절만 머무르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꼬박 하루를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시 숙소 예약도 안 했는데… 니스 호텔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 파리의 저주가 이곳까지 이어지는구나… 망할 프랑스!!!
머리가 복잡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의 가난한 여행자는 재빨리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렸다. 절망, 좌절, 분노의 감정들이 차례로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예상치 못한 변수’가 반전을 몰고 왔다.
프랑스어를 1도 못하는 동양 여자애 둘이 손짓 발짓해서 다시 눈물의 기차 티켓을 끊고, 역을 나선 순간 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호수와 그 뒤에 펼쳐진 그림 같은 알프스의 풍경.
만년설이 쌓인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청량한 바람 하나로 파리에서부터 이어진 각종 설움들이 단 번에 없어졌다. 파리에서 겪은 각종 악재들 때문에 프랑스 전체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쌓여갔는데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는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한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안시는 프랑스에 있지만 파리보다 스위스의 제네바가 더 가까운 도시다. 하늘을 보면 늘 제네바로 향하는 세계 각국의 비행기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가는 거점도시로 성장했던 과거 때문에 프랑스보다는 스위스를 더 닮아 있다. 알프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안시의 구시가지에는 여전히 15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창마다 꽃화분으로 장식해 놓은 모습이 마치 동화 속 마을 같다.
프랑스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이 붙은 안시의 구시가지는 구석구석 운하가 이어진다. 운하의 물길의 끝에는 안시 호수가 있다. 철저한 관리로 유럽 전역에서도 가장 맑은 물을 가진 호수로 꼽히는 안시호 위에는 한가롭게 백조가 노닌다. 호수 주변으로는 여유롭게 일광욕, 산책,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상상하던 풍경화 같은 유럽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나도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여유를 만끽했다. 대도시의 번잡함, 예민함, 치열함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새로 이메일 주소와 아이디를 만들 때마다 안시 Annecy를 넣었다. 그때의 감동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그인을 하기 위해, 메일을 쓰기 위해 안시 Annecy라는 철자를 칠 때마다 그때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행의 여신”이 그린 큰 그림이었을까? 그녀가 안시의 아름다움와 여유를 아낌없이 만끽하라고 파리에서부터 그렇게 많은 시련과 고난을 안겨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안시를 여행한 이후로 난 여행 계획을 짤 때 대도시 말고도 중소 도시를 가는 일정을 무조건 넣는다.
근래에는 공항이 있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근교로만 여행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마 크고 멋지고 화려한 것들 뒤의 쓸쓸한 그림자를 보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20대 때 보다 분명 체력도, 열정도 약해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신 그때보다 많은 시간적, 금전적, 감정적 여유와 넓은 시야가 생겼다. 꼭 크고 화려하지도 세련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게 많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된 거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는 것을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중소도시로 떠날 날을 기다린다.
중소도시 여행의 장점
- (비교적) 물가가 저렴하다
- (비교적) 사람들이 덜 상업적이다
- (비교적) 안전하다
- (비교적) 유니크한 지역색이 있다
- 무엇보다 기대가 적기 때문에 실망도 적다
추천하고 싶은 중소도시
- 프랑스 – ♥안시♥, 망통
- 스페인 – 네르하, 프리힐리아나, 지로나, 발데 누리아
- 포르투갈 – 아베이루, 카스카이스
- 영국 – 브라이튼
- 일본 – 오하라, 아라시야마, 우지, 고베, 나가사키
- 베트남 – 무이네, 달랏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