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영국 대륙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과 프랑스군은 계획대로 독일군을 상대하기 위해 전진했으나 실제로는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의 계획은 벨기에로 기갑전력 대부분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25번에 걸쳐 수정되었는데, 독일에는 다행히도 천재전략가 만슈타인이 있었고 그의 도박 같은 계획이 채택되었다.
북부 침공은 연합군을 북부에 붙잡아 두고 마지노선 못지않은 장애물인 아르덴느(Ardennes) 숲으로 기갑전력을 투입해 (계획 D에 따라) 벨기에로 달려간 연합군 주력의 배후를 남쪽에서 끊는 게 목적이었다.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공격형 구데리안과 롬멜이 선봉을 이끌었으니 효과는 배가되었다.
프랑스는 숲이 울창한 아르덴느에 전차가 통과할 수 없다고 보고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전차부대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스당(Sedan) 부근의 뫼즈(Meuse)강을 5월 14일에 건너 연합군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트렸고 영불해협(Channel) 해안으로 달려 연합군을 포위했다.
독일 계획대로 전차부대의 돌격은 혼란과 공포를 일으켰다. 프랑스군은 최전선 병사부터 최고사령부까지 전의를 잃었다. 영국 정부는 영국 원정군을 전멸위기에서 구할 BEF 사령관 고트(Gort) 경에게 프랑스군과 함께 반격에 나서 남쪽으로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 반격 계획은 번번이 무산되거나 취소되었다. 포위망을 돌파하는 반격 역시 성공여부가 불투명했다. 고트는 런던이나 파리보다 상황파악이 정확했다. 북쪽의 네덜란드는 이미 항복했고 벨기에도 항복 직전이었다. 남쪽에서는 독일 전차가 연합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었다.
고트는 해협의 항구로 후퇴하기로 했다. 시시각각 좁혀지는 후퇴로를 독일공군의 맹폭격과 독일군의 추격을 막아내며 나아가야 했다. 영국 공군(Royal Air Force, RAF)은 레이더탐지 거리와 전투기의 비행 거리 제약 때문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루프트바페(Luftwaffe)를 견제해주었다.
5월 19일, 영국 원정군을 구한 또 하나의 영웅 버트럼 램지(Bertram Ramsay) 부제독이 대규모 철수 작전 지휘를 맡았다. 그는 사령부가 있던 도버(Dover)성의 방 이름을 따라 다이나모(Dynamo)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각 지역에 흩어진 전투함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다. 개인소유의 선박도 긁어모아 수용하거나 지원받았다. 징발하거나 지원받은 소형선박 약 700척이 투입되었다. 민간함대(Little Ships) 또는 모기함대(Mosquito Armada)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려 현재까지도 5년마다 모기함대가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덩케르크까지 기념 항해를 한다.
또한 덩케르크 문장이 그려진 성 조지(St. George) 십자가를 게양하는 명예를 받았다. 원래 성 조지 십자가 기는 영국해군 제독기로 민간선박은 게양할 수 없다.
독일의 공격이 계속되자 연합군에게는 덩케르크(Dunkirk) 항만 남았다. 파도가 높고 모래톱이 많아서 대규모 철수는 고사하고 항해도 힘든 곳이었지만 항구를 벗어난 내륙은 습지와 운하가 있어서 방어에 더없이 좋았다.
독일군은 전차부대를 잠시 멈추었고 연합군은 축복과 같은 2일의 휴식을 통해 방어선을 만들었다. 영국군이 불로뉴(Boulogne) 항에서 끈질긴 저항을 하면서 독일의 전진은 더 지연되었다.
불로뉴 수비대는 마지막 순간에 철수했고 영국 구축함은 독일 전차와 포격전을 벌이다가 함장 3명이 전사했다. 해군은 칼레(Calais) 수비대도 소개시키려 했지만 처칠은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고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끝까지 버티라고 명령했다.
5월 26일 일요일 오후 6시 57분, 램지는 다이나모 작전 개시 명령을 받았다. 소개 작전은 마구잡이로 수립되었고 개시 직후 덩케르크가 함락될 수도 있었다. 램지가 수립한 임시계획에 따라 수송선박이 프랑스로 향했다. 램지가 담당 장교로 임명한 빌 테넌트(Bill Tennant) 대위는 이튿날 폭격으로 덩케르크항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마을 동쪽에서 벨기에 국경까지 이어진 모래 해변을 돌아보았다. 크게 말로레방(Malo-les-Bains), 브레뒨느(Bray Dunes), 라판느(La Panne)로 구분되는 해변은 연합군이 모이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완만하게 기울어진 해변과 얕은 수심 때문에 큰 선박은 병사들이 바로 탈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작은 구명정을 이용해서 해변에서 병사들을 실어 날랐지만 미숙한 병사들이 계속 망가트렸다. 결국 전설이 된 민간함대가 대활약했다. 병사를 본국이나 먼 바다의 대형선박으로 실어 날랐다. 다이나모 작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 해변에는 엄청난 수의 병사가 해변이나 모래언덕에 모여들었고 줄지어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결과만 놓고 보면 해변으로 탈출한 병사가 1/3이나 되었다. 하지만 승선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독일군의 공격으로 포위망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을 소개시키려면 제대로 된 항구시설이 필요했지만 독일공군이 폭격으로 부순 상태였다.
테넌트는 다시 방파제가 있는 외부항 두 군데를 돌아보았다. 오일 터미널이 서쪽 방파제(West Mole), 마을 쪽의 동쪽 방파제(East Mole). 동쪽 방파제는 1.6km 길이로 콘크리트 더미 위에 나무 보도가 있었다. 대형선박이 접안하기 적당하지 않았지만 테넌트는 여객선 접안을 테스트했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동쪽 방파제는 공중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접안하는 선박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대규모 병력이 바로 승선해서 탈출하려면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덩케르크에서 탈출한 병력 중 70%는 항구로 빠져나갔는데 대부분은 동쪽 방파제 루트를 통했다. 종군목사는 해군을 보는 그 순간만큼 심장이 떨린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신이시여. 드디어 해군이 왔습니다.”
해군은 선박만 보낸 것이 아니라 철수 작전 조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동쪽 방파제는 캐나다 사령관 잭 클로스톤(Jack Clouston)이 통제했다. 그는 밖에서 대기 중인 병력을 방파제로 유도해 승선시켰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방파제는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다. 6월 2일 일요일, 클로스톤이 도버로 건너가 마지막 철수 협의를 한 후 타고 되돌아오던 어뢰정이 침몰했다. 며칠 동안의 과로로 이미 탈진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배로 헤엄칠 체력이 남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밀려가다가 익사로 목숨을 잃었다.
임시방편으로 시작한 다이나모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고 선박이 더 많이 투입되면서 소개병력도 계속 늘어났다. 5월 27일에는 겨우 7,600명만 탈출했지만 29일 4만 7,300명, 30일 5만 3,800명, 31일 6만 8,000명으로 급증했다가 6월 1일에 6만 4,400명으로 약간 줄어들었다.
6월 2일, 테넌트는 “BEF가 철수했다”고 보고했다. 외곽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만신창이가 된 선박, 수병과 선원에게 3일만 해협을 건너 달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7만 9,000명을 더 구해냈다.
6월 4일 화요일, 다이나모작전이 막을 내렸다. 이튿날 램지 부제독은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났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믿을 수 없구려.”
그의 표현이 정확했다. 이틀로 계획했던 작전은 9일 동안 진행되었고 338,226명이 전멸 위기를 벗어났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와 폴란드 선박도 참여했고 영국 해군과 민간선박이 90%를 실어 날랐다.
6척의 귀중한 구축함을 잃었고 최소 100척 이상의 소형선박이 침몰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덩케르크 기적을 일으켰다. 육군을 전멸위기에서 구해냈을 뿐 아니라 영국을 패전위기에서 구해냈다. 왕실포병 통신병 알프레드 볼드윈(Alfred Baldw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국민은 우리가 돌아가자 참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우리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다른 전투에서는 우리가 이겼다.”
프랑스원정은 재앙으로 끝났고 저지대국가(Low Countries)와 프랑스가 전열에서 빠져나갔지만 다이나모 작전의 기적 덕분에 독일은 완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영국은 전쟁을 계속할 용기를 얻었다.
아주 간단한 부가설명
- 영화에서 보병들이 영국 공군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올 겁니다. 실제로 독일 공군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욕했고 추락해 탈출에 합류한 조종사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당시 영국 공군은 혈전을 벌였습니다. 본토에서 날아와 아주 짧은 시간만 상공에 머무를 수 있었고, 안개 위에서 공중전을 벌여 보병이 알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보급로 폭격에도 나서 거의 격추당했습니다.
- 독일군이 덩케르크 목전에서 2일간이나 멈추는 기적이 벌어져서 연합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34만 명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갑자기 멈춘 이유에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라스(Arras) 반격에 놀란 독일군은 연합군의 반격과 파리방면 진격을 대비해 전열을 정비합니다. 5월 26일에 재진격 결정이 났지만 2일간 비가 내려 습지대인 덩케르크로 제대로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공군만으로도 연합군을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는 괴링의 허풍을 믿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