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좌우하는 많은 요소가 있다. 사람, 돈, 음식, 컨디션 등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황금비율로 조화가 되어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여행이 된다. 사람마다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겠지만 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날씨가 맑다고 좋은 여행이 아니고, 비가 온다고 망한 여행이 되는 건 아니다. 옷 좀 입는 사람들이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 즉 TPO에 따라 옷을 골라 입는 것처럼 여행도 날씨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비가 여행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비가 와야 비로소 그 매력이 폭발하는 여행지가 있다.
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나는 단연 비 오는 제주를 꼽는다. 비 내리는 제주를 즐길 수 있는 소소한 방법을 공개한다. 단 생명에 위협을 주는 폭우가 아닌 일상 활동이 가능한 부슬비 수준의 비가 올 때를 기준으로 한다.
1. 카페 놀이
발끝에 비 한 방울 안 젖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아마 제주에서 비가 올 때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좋게 말하면 클래식한 여행법, 흔히 말하면 뻔한 여행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호불호가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비가 올 때 가야 할 카페를 고를 때는 조금 더 까다로워진다.
창에서 제주의 풍경이 보일 것, 한산할 것, 커피를 제대로 할 것, 주인장이 무심할 것, 선곡이 잔잔할 것, 말소리에 음악 소리가 묻히지 않을 것 등등 세심한 기준을 통과한 카페에 안착했다면 이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비 올 때 카페에 앉아 비 오는 거 보면서 아무것도 안 하기’라는 도시에 있을 때 늘 꿈꾸던 그 로망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2. 중산간 드라이브 하기
제주에 바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에는 중산간이라는 곳이 있다. 한라산과 해안가 중간에 있다 해서 중산간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숲과 오름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특히 이 지역은 연간 강수량이 대한민국 평균 강수량의 두 배에 이를 정도로 자주 비가 오는 곳이다.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는 이 지역의 매력을 비교적 편하게 만끽하는 방법이 바로 1100도로, 5∙16도로, 비자림로 등 중산간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것이다.
도로 위로 그윽하게 깔리는 물안개, 짙은 나무숲 사이를 흘러가는 구름 등 비가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백미다. 이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 길 끝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이 겪을 법한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깊은 산속에 사는 자연의 친구들이 툭 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으니 과속운전에 주의할 것!
3. 미술관 가기
제주까지 와서 무슨 미술관이냐?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의 미술관은 이중섭미술관, 아라리오 뮤지엄, 본태 미술관, 제주 도립 미술관 등 제주만의 강렬한 색과 향을 담은 곳이 많다. 제주의 무수한 미술관 중 개인적으로는 제주 도립 미술관을 추천한다. 건물에서부터 제주를 대표하는 미술관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제주의 물, 바람,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미술관은 주로 제주 출신의 작가나 제주를 주제로 한 전시들이 이뤄진다. 전시를 보고 나면 꼭 들르는 곳은 바로 1층에 있는 카페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창가 바로 앞의 좌석을 제일 좋아한다. 나는 늘 그 자리에서 한라봉 주스 한잔을 마시며 전시의 여운을 곱씹는 것으로 제주 미술관 여행의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다.
4. 숲길을 걷기
개인적으로 쨍한 날보다 일부러 비 오는 날 챙겨 가는 곳이 제주의 숲이다. 사려니숲길, 삼다수 숲길, 곶자왈 도립공원, 절물 자연휴양림, 비자림 등 우거진 숲에 비가 오면 특유의 그 분위기와 향기가 더 짙어진다. 은은하게 깔리는 안개, 공기 하나하나에 스며든 나무향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사람이 적다. 한적한 숲을 산책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특히 비가 오면 스트레스 해소, 심폐 기능 강화 등의 효과가 있는 자연 항균 물질인 피톤치드가 더 많이 나온다고 하니 요즘 같은 장마철에 더없이 좋은 여행지다.
5. 해변 포장마차 가기
사실 육지에 있을 때 포장마차를 즐겨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운치를 빼고는 맛, 가격, 서비스 어느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는 요즘 포장마차들의 행태에 반기를 들고 혼자 소극적 불매 운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에 살며 알게 된 인생의 소소한 참맛 중 하나가 ‘비 오는 날 포차 가기'(용담해안도로 전망대 포차)다.
일반적인 노점 포장마차라기보다는 가건물 형태의 포장마차이긴 해도 부담 없이 제주의 정취를 느끼며 술 한잔 하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나 이렇다 할 밤 문화가 없는 제주생활에 쏠쏠한 일탈의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맑은 날도 좋지만 비 오는 날엔 더욱 그 운치가 배가 되는 제주 해변의 포차들을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주의!
제주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날씨가 변화무쌍하므로 결코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 것! 언제 폭우가 당신을 덮칠지 모르니 늘 조심하라!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