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옥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숭고한 아름다움과 현실의 아이러니
〈옥자〉는 아름답다. 거대 기업의 기만, 잔인한 육식 시스템, 비정상적 인간들의 자기모순을 다루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는 절망적인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숭고한 필터를 사용했다. 첩첩산중의 강원도 산골, 거대한 자연에 ‘옥자’와 ‘미자’ 둘만 존재하는 듯한 모습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잊고 있던 이 좁은 반도의 대자연을 기억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우정이라는 생명의 원초적인 연대감을 들이마신다. 그 기억은 옥자가 지하 실험실로 끌려가고 미자가 그를 찾아 도시를 헤매면서 훼손되지만, 결국 엔딩에서 복원된다. 옥자와 미자는 마치 태초의 인류가 그러했듯 ‘저 푸른 산 위에’서 영원할 것만 같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흔한 디즈니 영화를 보는 듯하기도 하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 옥자가 악당 기업 ‘미란도’에 끌려가고 미자는 그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결국 조력자인 비밀 단체 ‘ALF’의 도움을 받아 옥자를 구출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선과 악, 조력자와 귀환까지 동화적 모험 이야기의 전형적인 요소가 모두 담겨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동화적 모험 이야기는 개별 인물들의 사정으로 묘한 아이러니를 띤다. 미란도 기업의 CEO 악당 루시는 악당으로 보이는 걸 참을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아름답고 선한 존재로 비치길 원하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다. 슈퍼돼지가 우연히 발견된 게 아니라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즉 전혀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진실을 숨기면서도 결코 그 일이 나쁘다고 믿지 않는다.
문제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근거 없이 나쁘다고 믿는 소비자들에게 있다. 루시는 소비자들의 편견을 극복게 하고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선’에 자신을 놓아두려고 한다. 그녀는 악당이고 싶어 하지 않는 악당, 스스로를 악당이라 믿지 않는 악당이다.
선의 조력자인 비밀 동물 보호단체 ALF의 ‘제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과 동물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폭력에 반대하며 40년 전통을 이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조직원 케이가 그에게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잔인하게 그를 폭행한다. 그가 사랑하는 건 생명 그 자체라기보다는 생명에 대한 ‘이념’이다.
우리는 이처럼 이념과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학살이나 광신, 독재 따위가 모두 이러한 인간의 ‘이념적 성향’ 때문에 탄생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제이가 마냥 ‘선’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가장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인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이러한 인물들을 넘어서 전반적인 이야기 진행과 결말에서도 발견된다. 미자는 슈퍼돼지 옥자와 아기 돼지까지 데리고 고향의 산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익히 그녀의 할아버지 희봉도 말했듯이, 소녀가 언제까지나 학교도 안 다닌 채 동물과 산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에게는 분명 그곳을 떠나야 할 미래가 있다.
그뿐 아니다. 미란도에는 여전히 구출되지 못한 무수한 돼지들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옥자와 같은 해방의 가능성이 결코 없다. 과연 미자의 뇌리에서 그 잔인한 실험실과 사육장의 이미지가 영원히 사라지기는 할까? 슈퍼돼지 사육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될 것을 생각한다면 엔딩 장면의 산골짜기 아름다움도 반감된다. ‘저 푸른 산 위’의 아름답고 숭고한 행복이란 실상 환영에 불과하다.
〈옥자〉는 숭고한 아름다움과 현실의 아이러니가 물고 물리며 다투는 각축장이다. 동화나 현실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묘한 조합은 자꾸 잔상을 남긴다. 우리는 〈옥자〉 앞에서 고발당하기도 하며 〈옥자〉의 아름다움에 감화되기도 한다.
미의식이라는 병
〈옥자〉에서 가장 거대한 대립 구도는 ‘미란도’와 ‘ALF’가 이루고 있다. 그들은 각기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이끈다. ‘미란도’는 자본의 무한한 증식,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돈으로 환원하는 흐름을 대변한다. 반면 ‘ALF’는 이에 맞서서 생태주의적이거나 환경지향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꿈꾸는 일련의 시민활동을 상징한다.
실제로 현대 세계에서는 이 두 거대한 지향의 싸움이 이어진다. 대체로 자본의 무한 증식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파리협정이나 그린피스의 자연보호 운동 등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우리는 대체로 자본이 악이고, 자연 친화성이 선이라는 선입견을 어렵지 않게 지닌다.
문제는 ‘거대한 구도’에서는 선악의 대립으로 보이는 일이 개별 인간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악의 상징인 미란도의 루시와 선의 상징인 ALF의 제이는 묘하게 닮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선’에 속해 있다는 관념을 포기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아름답고 거대한 일에 속해 있기를 바란다.
옥자가 탈출하고 미자가 끌려갈 때 루시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기업의 이윤이 줄었다거나 프로젝트에 제동이 걸렸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 장면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다’는 데 있다. 인류 식량 문제를 해결한 친환경의 상징이었던 ‘미란도’가 졸지에 악의 축처럼 비치는 일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루시의 비서 프랭크 도슨은 이를 꿰뚫어 보고 의연하게 대안을 제시한다. 옥자와 미자가 재회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루시는 다시 ‘아름다운 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산골 소녀와 반려동물의 ‘아름다운 재회’를 추진한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 즉 미의식에 집착하는 것은 ALF의 제이도 다르지 않다. 그의 시선에는 늘 아름다운 것을 실현하고 바라보는 듯한 감상성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과 동물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미자가 눈앞에 있을 때도 자신의 머릿속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 앞의 현실이 자기 머릿속의 이상과 맞지 않을 때마다 그는 손가락을 손톱으로 짓누른다. 자기 안의 미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자기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체에 대한 관념(이상)의 우위, 달리 말하면 신체성에 대한 억압이 징후적으로 드러난다.
루시와 제이는 모두 신체성을 억압한다. 루시는 동물들은 마구잡이로 실험하고 공장식 시스템에 가둔다. 제이는 인간과 동물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스스로의 신체와 조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옥자가 실험당하는 걸 방치한다. 이는 선과 악의 대립 구도로 보이는 것이 실상은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 문명 자체가 신체성에 대한 억압인 것이다.
이로부터 벗어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ALF의 조직원 ‘실버’는 자연을 훼손하는 제조과정 때문에 토마토조차 먹지 않는데 이러한 식음 전폐조차 무의미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트럭, 사용하는 샴푸 따위는 ‘비자연적’이지 않은가? 결국 이들은 모두 신체성을 억압하는 ‘결벽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렇기에 〈옥자〉는 동물 보호나 생명 존중에 대한 영화일 수 없다. 오히려 이 영화가 지적하는 건 인간의 근본적인 모순과 딜레마다. 우리 문명 전체에 깔린 폭력성은 결코 씻어 내거나 제거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폭력 위에서 어느 정도의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폭력 없는 문명, 모순 없는 천국은 이 땅에 도래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폭력을 없애고 모든 모순을 극복하겠다는 이상(미의식)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을 불러온다. 파시즘을 비롯한 역사상 거의 모든 급진적인 운동이 그랬듯이 말이다.
한 걸음의 사랑
통역은 〈옥자〉의 유머 포인트이면서 영화 내내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다. 케이는 미자와 제이 사이의 통역을 맡는다. 버벅거리긴 하지만 통역은 꽤나 훌륭하고 재미있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케이는 미자의 말을 일부러 잘못 전달한다.
제이는 미자에게 옥자의 구출을 제안하지만 미자는 그저 옥자와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케이는 미자가 제이의 작전에 동의하는 것처럼 속였다. 이후 케이는 자신의 거짓말을 고백한다. 제이는 ALF의 ‘신성한’ 전통을 모욕했다면서 케이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다. “통역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미란도와 미자 사이에도 통역의 문제가 있다. 미자가 원하는 것은 당장 옥자를 만나는 것뿐이다. 하지만 미란도에서는 미자와 옥자가 만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기업 이미지를 복원하길 원한다. 미자는 옥자와 ‘지금’ 만나길 원하지만 글로벌 기업 미란도에게 미자는 소통의 대상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미자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다. 미자는 그들처럼 ‘미의식’(기업 이미지)이나 ‘자본’(기업 이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자가 원하는 것은 즉각적인 신체성, 즉 접촉과 만남이다.
반면 미자와 옥자 사이에는 통역이 필요 없다. 미자가 옥자의 엉덩이를 두들겨줄 때, 옥자가 미자를 절벽에서 구해낼 때, 도시에서 서로를 부르며 찾을 때 소통은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사실, 곁에 있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미란도의 루시나 낸시(루시의 언니), ALF의 제이나 케이는 결코 그들의 마음에 닿을 수 없다. 그들은 관념이나 미의식 안에서 살 뿐 마음을 담은 신체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통역이 ‘신성’한 이유는 마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법을 잊은 인간은 이념이든 미의식이든 신성이든 신체를 벗어난 ‘초월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결국 〈옥자〉가 고발하는 건 인간의 관념성, 즉 초월성이다. 고도의 관념으로 탄생한 우리 문명은 온갖 폭력 위에 서 있다. 깨끗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사회 아래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한 억압이 깃들어 있다. 〈옥자〉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자신의 입안에 들어와 우리의 세포를 이루게 되는 것들을 혐오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우리를 이루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혐오다. 하지만 그 혐오야말로 ‘관념적인’ 것이 아닌가?
미자는 아무것도 혐오하지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옥자를 사랑하지만 물고기나 닭은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물고기나 닭과는 소통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미자에게는 자신을 괴롭히는 관념도 없고 자기를 씻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늘 그랬듯이 사랑하며 사는 것뿐이다. 이 영화에서 그처럼 단순하고 당연하게 살아가는 것은 오직 그녀밖에 없다. 그 밖의 거의 모든 인물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고 미쳐 있다. 마치 우리 문명인 대부분이 그렇듯 말이다.
〈옥자〉가 우리 현대인에게 어떤 대답을 제시한다고 보긴 어렵다. 육식을 중단해야 한다거나 동물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도 아니다. 그저 이 영화는 우리가 무엇에 ‘미쳐 있는지’를 묻는다. 그를 통해,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그 무언가에서 한 걸음 물러나보기를 속삭인다. 혹시 우리도 어떤 의식의 병에 걸려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볼 노릇이다. 우리는 미자와 옥자처럼 조금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그저 사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