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의 어느 날, 대학원생 및 연구자 17명이 모여서 나누었던 연구방법 및 생존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학업, 연구, 논문 읽기 및 쓰기
- 논문을 읽을 때는 자신의 분야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전략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초록과 서론 및 결론을 읽고 나서 세세히 본문으로 들어가는 전략, 레퍼런스를 먼저 훑어보고 어떤 학자들의 논쟁이 등장할지 예상한 후에 본문을 훑어보는 전략, 테이블 및 피겨를 먼저 보고 해석해보는 전략 등. 끝없는 논문 읽기를 시간 내에 마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런 논문 읽기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인풋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 읽는 것 자체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논문을 잘 읽을 수 없습니다. 논문을 독해하기 어렵다면 읽는 것 자체를 잘하지 못하거나, 분야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충분한 읽기 양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 이해해야 논문을 잘 읽기 위한 방향도 설정할 수 있습니다.
- 논문을 읽으며 아카이빙하는 것 역시 읽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서지학 공부하는 분께 “찾을 수 없는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논문을 읽으며 인덱스카드를 만들든 서지 프로그램이나 워드프로세서로 정리해도 좋습니다. 따로 노트를 만들어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 의문점, 아이디어를 미래의 자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한 후 키워드, 저자, 프로젝트별로 정리해 놓으세요. 그래야 논문을 쓰거나 수업을 들을 때 쉽게 다시 생각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 어떤 논의를 쫓아가기가 어려울 땐 리뷰 페이퍼나 교과서로 쓰이는 책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분야마다 그때까지의 연구를 망라해 놓은 리뷰 페이퍼가 하나씩 있어요. 그걸 찾아서 논의를 쫓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리뷰 페이퍼가 한쪽 입장에서 쓰였을 경우를 감안하여 읽어야 합니다. Cambridge Companion, Oxford Handbook, Blackwell, SAGE, Routledge 등 주요 출판사의 핸드북이나 컴패니언 등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논문을 쓴다는 건 서사를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기존 연구를 읽으며 학자들이 대립하는 지점, 아직 연구되지 않은 지점, 기존 서사의 문제점은 어떤 건지 파악하고 매핑(mapping)해야 하며, 그 담론 안에 자신의 연구를 위치시켜야 합니다.
- 첫 논문은 일찍 써야 합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지도교수 및 동료와 협업하고 업무 분담하기, 논문에 쓰이는 문체와 형식 익히기, 실험 설계하고 진행하기, 초록부터 참고문헌까지 하나의 완성된 글을 쓰기, 저널 탐색 및 저널의 성격에 맞도록 수정하기,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받고 다시 수정하기, 리젝 먹고 멘탈 추스리기, 저널 재탐색하고 다시 투고하기, 커버 레터 쓰기 등은 논문을 하나 투고해서 게재해 보지 않으면 체득하기 어려운 과정입니다. 이걸 경험해 봐야 이후 자신의 논문도 계속 써나갈 수 있습니다.
- 빡세게 많은 논문을 쓰는 것과 공을 들여 오랫동안 적은 수의 논문을 쓰기. 이건 사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 밸런스를 맞춰야 합니다. 전자는 다른 연구자들이 논문의 질에 의심을 가질 수 있고, 후자는 양적 평가를 하면 아무래도 점수가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 연구 방법, 연구에 필요한 툴/프로그램 사용법, 데이터 분석방법은 가능한 한 일찍 배워 익숙해져야 하고 계속 업데이트해나가야 합니다. 아카데미아의 글은 지금까지 학자들이 쌓아온 논의에 기반 두고 학문적 방법을 통해 데이터를 분석하여 아이디어를 증명해내는 글입니다. 어떤 데이터나 아이디어를 학술적으로 의미 있게 만들려면 적절한 연구방법, 실험, 데이터 분석을 거쳐야 합니다.
생활 및 멘탈 관리
- 대학원 과정이 자신의 커리어에 긍정적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뚜렷한 목표가 없는 대학원 진학의 경우 그 과정을 잘 견디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산업계, 학계, 전문가, 커뮤니케이터 등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학위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사는 너무 많이 배출되고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지도교수, 연구실의 합이 자신의 가능성을 높여주는지 반드시 계산적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학원에서 학문만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학원에서 마주하게 될 여러 장애물과 기회비용을 미리 생각해 보고, 그럼에도 대학원이 꼭 필요한지 고찰해 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 자신을 면밀히 분석해봐야 합니다. 혼자 연구하는 타입인지,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는 타입인지, 고독을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는지, 타인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는 게 좋습니다. 자신의 한계치를 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폭발할 수 있습니다. 타인이 있을 때 감정적·정신적으로 안정되는 타입이라면 연구의 긴 터널을 끝내기 전에 결혼을 고려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 맡겨진 첫 일을 꼼꼼하게 잘해야 합니다. 첫 학기는 교수, 동료, 자신이 연구에 적합한지 서로 살펴보는 기간입니다. 자신이 이 시스템에 맞는 사람인지 평가받는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긴장해서 해내는 게 중요합니다. 첫 평가가 앞으로 남은 대학원 생활을 좌우할지도 모릅니다.
- 대학원을 풀타임으로 다니는 경우 좀 더 학업에 신경 쓸 수 있고, 교수들과 친밀성도 쌓을 수 있고, 연구역량도 파트타임보다 더 키울 수 있으며, 9-18시 업무시간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장인은 풀타임으로 깊게 공부하기보다는 파트타임으로 학위를 따서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선하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건 굉장히 힘들고 체력에 부담이 오지만 대학원생 중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직장을 다니며 공부하므로 ‘나만 파트타임으로 공부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정신없이 바쁠 땐 자신이 언제 가장 생산적이고 집중을 잘하는지, 언제 자투리 시간이 생기는지, 어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지 면밀히 분석해서 자신의 리듬에 맞는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가령 아침 8-10시에 집중이 제일 잘 되는 사람이라면 그때 가장 집중력을 많이 요하는 논문 쓰기를 하고, 10시 이후부터는 발표자료를 만들고, 이동시간인 12-13시에는 태블릿으로 메일에 답하는 식으로요. 또한 공부 시작할 때 걸리는 버퍼링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평소 뇌 메모리의 일정 부분만이라도 지금 하는 연구에 할애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 일 단위의 계획 외에도 달 단위, 연 단위로도 대강의 틀을 잡아놓는 게 좋습니다. 학위논문이나 중요 프로젝트 데드라인은 미리 고지되니 데드라인 1-2주 후에 여행이나 휴식 스케줄을 잡는다거나, 정신없이 바빠지는 달을 예상한 후에 미리미리 일정을 비우는 식으로요.
- 처음부터 포지셔닝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고 어디까지 못 하는지. 무언의 압박과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이 계속 들어와도 못 하는 건 못 하는 겁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다가 안 될 것 같을 때는 적절히 No를 말해서 자신의 공부 시간을 확보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외부의 압박을 막아낼 방어막과 지지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어쩌면 공부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만들어 놓으면 추후에도 공부에 집중할 자산이 됩니다.
- 커뮤니케이션을 잘해야 합니다. 모든 걸 주어진 기간 내에 다 해내면 가장 좋겠지만 불가능한 경우 기한을 넉넉히 잡은 후에 그때까지는 꼭 해내겠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증세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적극 요청해야 합니다. 혼자서 끙끙 앓는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 ‘나는 사회생활을 잘 못하니까 대학원에 가야지’라는 생각은 잘못됐을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팀을 옮기거나 이직을 할 수도 있지만 대학원에서는 정해진 지도교수와 정해진 동료(혹은 랩), 폐쇄된 환경 속에서 수년을 보내야 합니다. 오히려 회사보다 더 많은 사회생활 스킬이 필요한 게 대학원입니다.
- 리젝을 먹거나, 시험에 떨어지거나, 펀딩이 끊기거나, 심지어 프로그램에서 쫓겨난다 해도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적어도 80년은 살 텐데 그중 3-5년을 돌아가더라도 큰일이 아닙니다. 당장은 이 학위과정이 전부인 것 같고 이 학위를 못 따면 인생이 실패한 것 같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더 넓은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우울증이 올 것 같거나 정신이 아파질 것 같을 때쯤엔 상담이나 외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병에 걸리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너무 힘들어졌을 때 상담을 받으려 하면 학생용 무료 상담이나 저렴한 상담의 스케줄이 꽉 차 있거나, 아예 전화를 걸 수 없거나, 방 밖으로 나가기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 학과 내 정치는 힘없고 미천한 일개 대학원생으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지도교수도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을 때가 생깁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건 신경을 덜 쓰는 게 답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