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방언 중에 ‘괸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친족 같은 관계를 뜻합니다. ‘괸당’이라는 말처럼 편견의 벽을 허물고 장애, 비장애인이 힘을 합쳐 기적을 만드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장애인이 아닌 장인이 되는 곳, 제주도의 ‘평화의마을’을 소개합니다.
여기는 기적을 일으키는 정류장, 평화의마을입니다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드물게 오는 750-3번을 타고 50여 분 갑니다.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여기는 평화의마을입니다.
이곳에 내리시면 작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을 바꾼 기적이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있으면 가위로 잘게 찢어 변기에 넣곤 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왕따 당할 때마다 화장실에 숨어 혼자 했던 강박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 소년 때문에 사회복지법인 평화의마을 앞마당엔 포크레인이 들어오곤 했습니다. 꽉 막힌 하수관을 교체하느라고요. 붉은악마 단체 반팔티, 맘에 들지 않는 학용품… 하수구에서 나온 물건들을 가만히 보다가 이귀경 평화의마을 원장한테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아예 자신이 보기 싫은 물건들을 태워버리게 하면 되지 않을까!’
소년은 소각장 담당자로 임명되었고, 그로부터 15년 후 강박적인 특성을 살려서 포장라인에서 어떠한 불량품도 놓치지 않는 꼼꼼한 검수원이 되었습니다.
이번엔 전광석화 같은 주먹질 달인 이야기입니다. 이 소녀는 화가 나면 아무나에게 주먹질을 하고 뛰쳐나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손이 얼마나 빠른지, 이 원장도 피하지 못하고 꽤나 맞았다지요. 발도 빨랐습니다. 소녀가 뛰쳐나가기 시작하면 같이 일하던 담당 훈련교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나가지만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원장이 제안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이름을 부르자!
그날부터 동료들은 소녀가 뛰쳐나갈 때마다 손바닥을 입에 모아 다 같이 소리쳤습니다. “소녀야, 돌아와! 돌아와, 소녀야~!” 그로부터 17년 후 소녀는 평화의마을에서 최고의 야무지고 안정된 직원이 되었습니다.
사회적기업이기도 한 평화의마을에는 이 소녀, 소년같이 조금은 남다른 직원 26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평화의마을은 수제소시지 명가이자 제주 사회적기업 1호로 언론과 지역사회에서 꽤 유명하다고 합니다. 동네 버스 정거장 이름이 ‘평화의마을’로 붙여질 정도이니까요.
편견을 딛고 최고 품질의 소시지로 인정받기까지
이곳에서 만드는 수제소시지 브랜드 ‘제주맘’은 국내 최고급호텔 뷔페 메뉴로 납품되는 맛과 품질을 자랑합니다. 홍콩으로도 수출되고 있고요. 2013년엔 육가공계의 올림픽이라 할 만한 국제육가공박람회(IFFA)에서 금메달을 무려 6개나 받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내기까지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품질을 믿을 수 있겠어?’ 라는 편견이 있었다고도 해요. 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실력으로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이렇듯 평화의마을은 17여 년 남짓한 세월 동안 장애인 직원과 함께 천천히 성장하면서 이 동네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부산 출신인 이귀경 원장은 제주 장애인과 가족들한테는 제주말로 ‘괸당’ 즉 친족처럼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됐지요. 심각하게 시작해 웃음으로 끝나는 이들의 사연은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만난 어느 아이에서부터 비롯합니다.
“고통 줄이는 일 하겠다” “장애인 직업 재활시키겠다” 사명으로 모여
이귀경 평화의마을 원장(58)이 스무 살 무렵 1만여 원을 들고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점심을 얻어먹을 요량으로 앉아 있던 예배당으로 예닐곱 살 먹은 아이가 다가왔지요. 벽을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이의 고통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 아이는 뇌성마비에 시각장애가 있다’고 말했어요.
저도 모르게 오열하고 말았어요. 신이 있다면 왜 저렇게 작은 생명에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을까,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생명을 창조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삶을 보듬어 안아 주는 일은 내가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때 처음 본 저 아이 같은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이 원장은 소록도병원 간호사를 거쳐 거제도에서 특수학교양호교사로 일하다 지금은 남편이 된 남시영 평화의마을 이사장을 만났습니다.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이 적은 제주로 온 건 2000년. ‘내 자식은 직업 재활을 할 수 없다’는 부모들을 ‘돌아가신 후를 생각하라’며 설득해 한 명씩 훈련생을 모았어요. 제빵 훈련 등 여러 시행착오 끝에 고승철 공장장, 김덕윤 직업재활팀장, 정선열 운영지원팀장 등 지금의 주축 멤버가 모였습니다.
“우리 작업장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없어요. 다만 서로의 역량에 맞는 작업을 하면서 하나의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동료들이 있을 뿐이죠.” – 입사 12년 차 고승철 공장장
“장애인을 세금의 수혜자에서 세금 기여자로 바꾸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입사 11년 차 김덕윤 팀장
이 원장은 장애인 직원들에 대해 말할 때 ‘기능이 약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기능’이 남보다 조금 약한 것일뿐 그게 ‘장애’는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 ‘기능’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끌면 언젠가 다른 무언가의 기능으로 발전합니다. 채소밭에 물 주라 하면 비 오는 날에도 나가 물 뿌리는 ‘답답한 성격’은 해썹 작업장에서는 청결, 안전의 원칙을 누구보다 잘 준수하게 해주는 ‘성실성’이 되지요.
“비록 어떤 ‘기능’이 남보다 약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더 발전하기를 바라고 누군가 사랑할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코 뒤처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걸 발현할 기회를 얻기가 남보다 어려울 뿐이지요.”
– 이귀경 평화의마을 원장
이 원장은 언젠가는 평화의마을 사람들이 더 사랑을 나눌 가족 그리고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집 장가 들 가란 말이지!’ 사랑의 작대기까지 연결해주면서 말이죠.
내가 싫어 나를 바꾸고 싶을 때, 삶이 팍팍해 변화를 꿈꾸게 될 땐 제주 어딘가에 있는 ‘평화의마을’이라는 정류장을 상상해보세요. 이른 봄부터 씨앗 뿌리고, 매실 거두며, 직접 간장 담가 익기를 기다려 소시지에 넣고 발효시키며 느릿느릿 자신의 삶을 바꾸고 있는, 흔히 우리가 장애인이라 부르는 각자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장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원문: 이로운넷 / 필자: 박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