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과학기술은 편리하고 저렴하다. 스카이프로 통화하면 전화비도 제로다. 오늘 멀리 있는 아들과 공짜 통화를 3시간 즐겼다. 화상통화 덕분에 아내와 셋이 이야기를 나눈다.
사는 얘기도 나누지만 나한테 걸려들면 학술적 토론으로 진화해 버려 모두 골치를 앓는다. 이리저리 가지를 치다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장성한 자식과 할 말이 뭘 그리 많은지 다들 의아해하지만 사실 내가 건 토론 때문에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오늘은 서로 충고를 주고받기로 했다. 뭐 이것도 계획된 건 아니고 얘기하다 보니 갑자기 튀어나온 화제다. 내가 먼저 말했다.
“정의니, 나발이니 외치며 살자니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 너는 나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다. 넌 좀 자유롭게 살아라. 의무는 나 혼자로 충분하다. 혹시 내 페이스북 읽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글 읽지 말아라. 물든다.”
피식 웃으며 내게 응수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빠 글에 문제 많다. 첫째, 심각한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다. 둘째, 자신의 연구방법 틀에 갇혀, 다양한 관점이 부족하다. 셋째, 주제와 관점이 너무 올드하다. 새로운 의제에 둔감하며, 페미니즘과 같은 전통적 주제에 대한 구시대적 해석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들의 의도를 알고 입을 닫고 수용하면 그만일 텐데,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아 또 변명을 늘어놓고 말았다.
“첫째, 엘리트주의란 내가 최고며, 99%의 민중은 개돼지라고 여기는 생각일 텐데, 아무런 지성적, 도덕적 성찰도 없는 사람을 배부른 돼지로 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맞다. 나는 자유한국당 지지자를 그런 부류로 본다. 그 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배부른 돼지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도 있다. 바로 ‘깨어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들이다. 이들은 절대 다수나 과반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적지 않은 수라고 단언한다. 나 한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 이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나는 절대 독선적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수많은 깨어있는 시민들, 내 생각으론 대략 30%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둘째, 한 사안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네가 예로 든 주진형 씨와 같이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직관적인 접근방법이 있다. 그 점에서 그는 대단히 뛰어나다. 페북과 블로그에 그런 인재들이 ‘강호’에 널려 있다.
하지만 나는 학자다. 학자는 그들이 도입하지 않으려 하거나 적용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보다 근본적으로, 학술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 주고자 한다.
셋째, 나도 성평등주의자이며, 집안에서 그것을 몸소 실천해 왔다. 덕분에 나는 요리의 귀재로 진화했다. 하지만 나는 ‘올드한’ 성평등주의자임엔 틀림없다. 내가 아무리 성평등주의자라고 강변하더라도 새로운 의제를 소화하지 못해 그것을 옛 방식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긴 하다. 이런 걸 꼰대라고 부른다. 꼰대 안 되기 위해 네 충고를 접수하마.
하지만 올드한 방식을 모두 꼰대적 방식이라고 볼 순 없지 않을까? 현대적 감각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고전적’인 주제와 접근방식에 특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꼰대적 방식과 고전적(classical) 방식을 구분해 주면 좋겠다. 고전적 질문과 접근 방법은 오늘도 묻고 적용해야 할 어느 정도 보편적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화를 끊고 아내에게 꾸중을 많이 듣게 되었다. 자식의 충고에 대해 먼저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자신을 변호하는 지질한 모습을 보였단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아들이 당신 잘못을 지적해 주고 싶겠냐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나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습관에 젖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고쳐야 하는데 그게 참 안 된다. 연습이 좀 더 필요하다.
새로운 일감이 들어왔다. 글을 준비하는데, 유난히 글이 잘 안 나간다. 방송 준비나 글 쓸 때마다 고민으로 얼굴이 홀쭉해 지지만 오늘은 첫날부터 도무지 글이 안 나간다. 엘리트주의의 흔적, 딱딱한 아카데미즘, 고루한 꼰대주의의 습관!
최신기술덕분에 값진 쓴소리를 선물 받았는데, 이 충고를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성공하면 독자들로부터 더 많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터이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