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병원에 가는 일이었다. 아픈 것 자체는 걱정이 되지 않았었는데, 병원에 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맹장 수술 8만 불’하는 식으로 미국에서는 병원비가 엄청나게 비싸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전에 봤던 <식코'(Sicko)>라는 영화도 내가 미국에서 병원에 가는 일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 만드는 데에 일조를 한 것 같다. 물론 미국의 의료보험제도가 한국의 그것만큼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양질의 서비스를 고르게 받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있어서 ‘오바마 케어’같은 제도도 도입하였지만, 여전히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저소득층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내가 직접 경험한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와 의료 서비스, 진료 프로세스에 관해서 적어볼까 한다. 의료보험 제도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받더라도 의료서비스와 진료의 퀄리티가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으니까.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남기는 글입니다. 지역에 따라 보험의 종류와 병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의료보험과 의료비
기본적으로 미국의 의료보험은 민간보험이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보험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병원에 가느냐, 보험비를 얼마나 내고 진료비를 얼마나 내는지가 결정이 된다. 크게 보면 보험의 종류에 따라 HMO와 PPO가 있는데, HMO는 개인의 주치의가 있고 필요에 따라 전문의를 만나려면 주치의를 통해서 가게 된다. PPO는 주치의가 따로 있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전문의를 만나러 가면 된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본인의 건강 상태와 재정상태에 따라서 선택을 하면 된다.
내 경우에는 Bay Area로 이사 오자마자 거주하고 있는 동네의 병원들의 평판과 의료서비스의 질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보험을 빨리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다양하게 전문병원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의료보험보다는 한국처럼 큰 종합병원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보험을 찾았다. (보통의 경우 회사 입사하자마자 선택 가능한 의료보험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는 기간을 준다. 약 일주일 내외였던 듯) 결국 집에서 가깝고 평이 좋았던 Kaiser Santa Clara Medical Center를 갈 수 있는 Kaiser HMO(CA only) 보험에 가입했다. 보험료가 비싸기는 했지만(3인 가구 한 달에 약 $320씩 세전으로 납부), 왠만한 진료는 100% 커버되기 때문에 ‘맹장 수술 8만 불’같은 걱정은 놓을 수 있었다.
실제로 아내가 작년에 임신을 하고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는데, 임신 후 매달 정기검사 기간동안에는 단 $1도 들지 않았고, 출산 그리고 2일간 입원 및 퇴원할 때까지 병원비가 $20이었다. 특히나 얼마 전에 아이가 황달 증세로 치료받느라 병원에 5일간 1인실에 입원했었는데 그 역시 모든 병원비가 보험으로 커버되었다.
보험마다 의료비를 산정하는 방식이 다르긴 한데, 정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보험마다 Coverage Limit이 있고, 그 Limit을 넘어가게 되면 보험가입자가 병원비를 함께 납부하게 된다(Co-Pay). 좋은 보험일수록 Co-Pay의 비율이 낮겠지만, 매달 납부해야 하는 보험료가 높아진다. 반대로 병원에 갈 일이 별로 없는 건강한 청년들의 경우에는 매달 납부하는 금액이 낮은 보험을 많이 선택하기도 한다.
진료 프로세스
한국 병원과 비슷하게 ‘진단’하는 병동과 ‘치료’가 이루어지는 병동은 따로 있다. 온라인으로 약속을 잡고 정해진 시간에 방문하게 되면 의사와 상담을 하고 필요에 따라 진단이 이루어진다. 진단 결과에 따라 치료/입원이 필요하면 다른 병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 병원과 가장 다른 점은 ‘수납’이라는 절차가 별도로 없다는 점이다. 치료비가 막연히 비쌀 것만 같은 미국 병원에서는 의외로(?) 진료과정 중에 돈 얘기를 환자나 보호자와 절대 나누지 않 는다. 왜냐하면 의료비 산정과 청구 시스템이 진료과정과 별도로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의료행위에 따른 의료 단가는 병원에서 산정한다. 가령 A병원에서는 맹장수술비용이 8만 불일 수도 있고, B병원에서는 5만 불일 수도 있다. 병원마다 (어쩌면)의사마다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의 비용이 다를 수 있다.
진료가 종료된 후에는 병원이 내놓은 병원비를 환자가 가입한 보험회사가 분석하고 검토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보험에서 커버가 가능한 금액이 크면, 환자에게 적은 금액을 부담시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은 환자의 재정상태와 상관없이 환자의 치료와 완쾌를 위해서 ‘일단’ 최선을 다하게 된다.
병원비가 어떻게 부담되는지 정말 간략한 과정을 보자. 위의 A병원의 예로 보자면, 맹장 수술에 대해서 Q보험(의료비용 90% 커버, 10%만 Co-pay)을 가진 사람은 총 비용의 10%인 $8,000을 납부해야하고, W보험(외과 수술에 관해서는 $50만 Co-Pay)을 가진 사람은 $50만 내면 된다. 물론 Q보험을 가진 사람이 여전히 많은 금액을 내는 것 같지만, 이 역시 보험가입자가 1년에 낼 수 있는 의료비 한도가 정해져 있어서 – 예를 들면 년간 $3,000 – $3,000 만 내고 나면 나머지는 보험으로 커버가 되는 식이다.
병원비를 병원과 보험회사가 조정하고 검토하는 단계에서 최종 병원비가 확정되는 구조이다 보니, 높은 금액의 보험비를 감당 못 해서 의료보험이 없는 저소득층들은 병원에서 청구하는 병원비를 두고 함께 네고(Negotiation)를 해줄 보험회사가 없기 때문에 병원비 폭탄을 맞게 된다.(이런 경우를 우리가 많이 들어서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된다) 하지만 보험이 없더라도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병원 내에 Social Worker와 상담을 하면 이들이 병원비와 관련해서 보험사 대신 싸워(Claim)서 금액을 상당 부분 낮춰줄 수 있다.
의료 서비스
얼마 전 아들이 황달로 입원했을 때, 하루에 어림잡아 10번도 넘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 수시로 방문하면서 환자와 보호자들을 체크하더라. 병실 안에 조그마한 화이트보드가 있어서, 담당 간호사의 이름과 연락처는 물론, 현재 환자의 상태·예정된 진료·치료에 따른 목표 수치 등을 수시로 업데이트하면서 보호자와 모든 상황을 공유한다.
담당 의사는 보통 아침에 한번 와서 치료과정과 결과를 보호자에게 알려주고, 앞으로의 치료과정들에 대해서 보호자와 ‘논의’한다(통보가 아니다). 의사가 생각하는 치료의 방향에 대해서 보호자가 의문이 있거나, 생각하는 다른 제안이 있으면 격 없이 의사와 1:1로 논의하면서 더 좋은 방향으로 진료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지난번에는 소아과 담당 의사와 1:1로 논의하다가 더 좋은 방향이 서로 생각나서 다른 의사의 의견도 함께 물어보자며 즉흥적으로 내분비과 의사를 불러서 셋이 같이 40여 분 상의했었다. 그 결과 의사들도 만족하고 보호자인 나도 만족하는 진료 방향이 결정되었던 기억이 난다.
반면에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갈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의사와 만나는 시간은 고작해야 10분 내외였고, 치료 결과와 다음 단계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그에 관련한 상담을 깊게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웹사이트에서 본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에 의사가 만나는 환자의 수가 미국은 10~20명 수준이고, 한국은 50~90명 수준이라니, 의사가 불친절해서라기보다는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수의 환자를 봐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씁쓸한 자본주의
글의 앞머리에 미국의 의료보험제도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부유층과 빈곤층이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고, 그 문제는 민간 보험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보험료를 내는 사람들은 많은 금액을 커버 받게 되고, 빈곤층은 그렇지 못한 문제점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환자 중심의 의료 서비스의 질과 진료 프로세스만을 놓고 본다면 좋은 점도 분명히 있다. 다만 이 모든 좋은 점들이 자본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점이라는 것이 씁쓸한 일이지만.
원문: 히로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