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블라인드 채용제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 효과가 0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블라인드는 서류전형 한정해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전반적인 채용의 프로세스를 블라인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복면가왕 형식이 대안이기는 하다만).
개인적으로 취업 준비를 했던 기억을 살려 몇 글자 적어보고자 한다. 전제 몇 가지를 미리 말씀드리자면,
-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이유는 출신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좀 더 다양한 인재가 취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 1의 취지는 오히려 블라인드를 하지 않을 때 더 제대로 살릴 수 있다.
- 블라인드는 이름과 주소 외에 개인정보를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직무 관련 경험이나 자소서에 쓴 글을 보며 평가하는 것을 의미(어학성적, 자격증 사항은 제외)한다.
지방대 출신들은 루저가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블라인드 채용의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SKY로 대표되는 특정 학벌과 계서적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블라인드 채용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논의가 하나 빠져있다. 과연 누가 블라인드 채용의 수혜를 입을 것인가이다.
여성?
여성의 경우 블라인드를 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특정 성(性)이 일정 비율을 넘어가지 않도록 신입 채용에서 배려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 이력서에 남성인지 여성인지 명기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서류전형 때부터 성비를 최대한 비슷하게 맞춰주는 방식이 그래서 적절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름으로 유추하거나 해야 하는데 서류 읽기도 바쁜 와중에 이름 가지고 성별을 유추하는 작업은 얼마나 시간 낭비인가(…) 뭐 나 같은 반전사례가 있을 테고 말이다.
지방대 출신?
지방대 출신은 오히려 블라인드를 하면 손해다. 인서울 대학이 지방대보다 나은 이유는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서울이라는 국제도시가 가진 인프라와, 양질의 취업정보, 각종 대외활동 기회가 지방에 소재한 대학과는 넘사벽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요새 기업에서 점점 중요한 요소로 다루는 “경력”도 서울에서 더 손쉽게 쌓을 수 있다. 소위 월급 많이 받는 전문직종에 있어서 각종 (체험형) 인턴이나, 계약직 근무 기회를 어디서 가장 많이 잡을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답이 나온다.
‘어 그럼 지방대학 출신 인재 쿼터를 실시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그 자체가 이미 블라인드가 아니게 된다. ‘아니, 수도권 대학 출신인지 비수도권 대학 출신인지만 표시하고 나머지는 블라인드 처리하면 되죠’라고 다시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 특정 지역 출신이 서류전형에 대거 통과하거나 특정 지역 출신 중 지방대 출신은 1명도 서류전형에 통과하지 못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비수도권이라고 표시했는데 경상도 지역 출신이 99%라든가(…) 신입 공채의 서류 전형 자체가 사실 정확한 평가가 힘들기에 충분히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아니 그럼 각 광역시도별로 출신대학 소재지를 표기하면 안 되나요?’
거듭 말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더이상 블라인드가 아니다. 아니면 기재한 주소만 가지고 지방대 출신인지 유추해야 하는데, 그럼 집이 부산인 서울대생이 어부지리를 누리는 경우도 분명히 생긴다.
장애인이나 기타 유공자 내지 보훈자 (자녀)?
여성과 마찬가지다. 페친이신 김선함 님께서도 잘 지적해주셨지만, 채용시장에서 발생하는 차별은 기본적으로 정보 비대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시켜보기 전까지는 모르기에 대체로 경험에 근거한 통계를 바탕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선입견을 채용 절차에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발 과정에서 공정한 경쟁은 사실 아무리 채용 프로세스를 체계적으로 짠다고 하더라도 사실 보장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서울대 나왔다고 서류전형 프리패스하는 시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가장 근본적인 방안은 비수도권이 경제성장을 하는 것이지만 하나 마나 한 소리다.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추구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혹은 지금의 채용과정 내지 채용의 결과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짚어내서 거기에 맞게 채용절차를 바꿔 가는 것이 답이다.
두 번째로 근본적인 방안은 대기업 전공과 경력 위주로 채용을 진행하는 것이다. 즉 한국형 공채시스템의 폐지이다. 부서별로 TO가 생길 때마다 인원을 선발하며 경력을 쌓은 사람 위주로 뽑는다. 하지만 채용 문화는 단기적으로 바꿀 수 없으며 사기업의 경우 이런 채용문화를 강제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아닌 말로 직원 전원을 여자로만 뽑든 남자로만 뽑든 법적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일지라도 경로 의존성이나 비용 문제로 대규모 신입 공채 시스템에서 바꿀 유인은 떨어져 보인다.
근본적인 방안은 아니나 세 번째 대안은 할당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지방소재(비수도권) 대학 출신에게 일정한 쿼터를 주고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써가면서 비수도권 대학 출신에 대한 경험과 통계를 긍정적으로 바꿔 가는 것이다. 단기적 방안으로 보이나 역시 정착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이후 몇몇 금융 공기업에서 고졸 채용을 하고 있는데 볼멘소리가 조금씩 나온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역시 공공기관 외에 사기업에 강제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
아, 그럼 어쩌라고?
맞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블라인드 채용을 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개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원론적인 내용으로 돌아오게 된다. 공공기관 중심으로 채용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유인설계를 잘해서 민간에 그런 채용 문화가 확대되도록 하는 방법 외에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블라인드 한다고 인서울 명문대학 출신들에게 피해가 갈 일은 1도 없다. 블라인드 해서 본인이 서류 통과도 못 할 수준이라면 그만큼 본인이 게을렀다는 뜻일 뿐. 그렇게 유리한 환경에서 공부했는데 블라인드로 취직 가능성이 감소한다는 우려가 생긴다면 쪽팔린 줄 알아야 한다.
원문: 구봄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