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정몽준의 아들
한국 커뮤니티들을 다니다 보면 자주 접하는 단어가 있다. ‘미개한 국민성’이 그중 하나다. ‘미개한 국민성’은 정몽준 아들에 의해 더욱 대중화된 단어인데, 이 단어는 애초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단어로 쓰였다. 당시 그가 말했던 ‘미개한 국민성’은 지도자의 말을 믿지 않고 생떼 부리는 어떤 국민 행태를 일컫는 듯 보인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주 살기 좋은 국가는 한국의 북쪽에 있는 북한과 바로 옆에 있는 일본이란 나라다. 아, 저 멀리 조선일보가 찬양하는 싱가포르라는 국가도 이런 인식을 가진 자들에겐 좋다고 하겠다. 투표를 뭣 하러 하고, 정치 비판을 뭣 하러 하냔 말이야. 무조건 믿고 따라야지. 수령님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나?
‘미개성 국민성’을 정몽준 아들이 어떤 의미로 말했건 간에 이 말은 요즘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별로 신기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 〈부당거래〉의 양아치 검사(류승범 분)의 대사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알아요”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친절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은커녕 통수만 맞은 아해들의 현실 한탄 용도로 자주 인용된다. 어떤 단어나 문장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맥락과 거리를 두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몽준 아들이 비판했던 세월호 유가족은 요즘 뉴스에 나오지 않지만 그의 레거시인 ‘미개한 국민성’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한국의 웹상에 자주 등장한다. 이 단어는 축제가 끝난 뒤 쓰레기가 늘어져 있는 사진에, 길거리에 늘어진 쓰레기 사진에, 농심이나 남양이나 맥도날드에 대한 불매 운동이 일어났음에도 그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났을 때도 달린다.
국민들의 미개함 vs. 시스템의 미개함
국민들을 미개하다고 할 때의 문장들을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한국인을 미개하다고 할 때 그 말을 하는 당사자는 배제된 경우가 많다. 또 특정 운동이 실패한 것을 비아냥거릴 때는 그 운동에 딱히 참여하지 않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운동의 진정성에 공감한다면 운동 주체들을 비아냥대진 않을 것이다.
또 재미있는 점은 ‘한국인의 국민성’을 타깃으로 잡아서 말을 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은 정책이나 시스템에 대해선 이렇다 할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정몽준 아들과 통한다. 그 역시 비판의식은 전무했고 오히려 비판의식이 있는 자들을 미개하다고 했으니까. 이들의 포인트는 상당히 요상한 곳에 잡혀있다.
가령 축제가 끝난 공간에 쓰레기가 늘어서 있을 때 ‘미개한 국민성’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그곳에 왜 쓰레기통이 없는지, 애초에 왜 축제를 주최한 자들이 쓰레기를 처리할 인부들을 모집하지 않았는지 의심을 품지 않는다. 축제가 있다면 당연히 그곳에선 쓰레기가 발생한다. 주최 측은 인부를 모집해 쓰레기를 수거하고 처리하거나 최소한 쓰레기가 한곳에 모이도록 넛지(Nudge)를 해야 한다.
어떤 축제를 주최할 때 해당 장소를 대여하는 자는 그 장소를 이전과 같은 상태로 반환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축제 이후 어떤 장소가 더러워졌다면 비판할 대상은 티켓을 사고 그 장소에 입장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사에게 도움 될 거로 판단해 해당 장소를 빌린 주최 측이다.
그런데 도리어 어떤 이들은, 심지어 본인이 티켓을 돈을 주고 사서 들어간 소비자임에도 왜 청소를 하지 않느냐면서 다른 소비자를 비판한다. 무료입장 축제더라도 스폰으로 한껏 땡겼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최측을 고려하면 청소까지 해야 하는가 의문스럽다. 티켓까지 사서 들어갔으면서 왜 청소도 해야 한다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필자가 관리하는 ‘헬조선 늬우스’에도 이런 식의 제보가 꽤 많이 오는 편이다. 콘서트나 페스티벌을 갔는데 사람들이 어질러놓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 걸 고발한다는 식이다.
‘미개한 국민성’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대체로 과다한 임무를 ‘국민’으로 대표되는 어떤 집단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그 ‘국민’이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식도 못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불매운동을 통해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을 두고 “국민들이 미개해서 갑질하는 남양 불매한다고 해놓고 초코에몽은 또 사 먹는다 ㅋㅋ”라고 말하는 아새끼를 두고 생각해보자. 불매 운동의 주체와 남양 초코에몽을 구매하는 주체가 동일하다고 미리 단정해버린다. 왜냐면 두 존재는 모두 ‘국민’으로 퉁쳐지기 때문이다.
국민 A가 남양 불매 운동을 해서 매일유업의 음료를 사 먹어도, 불매 운동을 안 하는 국민 B가 남양의 초코에몽을 사 먹는다면 아새끼는 이를 두고 ‘국민들이 미개해서 갑질하는 남양 불매한다고 해놓고 초코에몽은 또 사 먹는다 ㅋㅋ’라는 말을 하게 된다.
게다가 어떤 운동의 실패를 두고 비아냥댄다는 건 당연히 어떤 운동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걸 전제로 두기도 한다. 대부분의 운동이 실패한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아새끼들이 ‘국민성’에 요구하는 건 과다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과다한 걸 요구한다, 항상.
‘미개한 국민성’을 말하지 않는 이유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한국인은 다른 국가의 국민과 달리 너무도 형편없는 어떤 기질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고, 누구도 알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정치라는 건 그것마저도 고려하여 실천해야 한다.
한국인이 너무도 더러워서 온갖 곳에 쓰레기를 던져 놓는 미개한 국민성을 가졌다면 정부는 ‘해볼 테면 해봐 시바알’이란 태도로 쓰레기를 온 동네방네에 다 배치해야 한다. 한국민들은 미개해서 종량제 봉투를 집 바깥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그러면 공익요원을 배치하거나 쓰레기통의 구멍을 작게 만들어 종량제 봉투가 들어가지 않게 하거나 근처에 CCTV를 설치해서 해당 이슈를 해결해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단순히 ‘한국인 존나 미개함’이라 하는 것보단 그게 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대처다.
‘미개한 국민성’을 말하는 아새끼들의 정치 인식은 되려 이 나라, 아니 사회를 진보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종 정치적 의제에서 언제 허물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국민들의 푸딩 같은 윤리성에만 기댄다면 사회는 안정을 찾기 힘들 거다.
콘서트장의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서트장에 방문하는 자들의 윤리성(콘서트장의 쓰레기를 치우는 건 윤리라기보단 윤리성에 대한 결벽증이라고 밖에 안 보이지만)에만 기대하면 어떤 때는 깔끔한 콘서트가 되겠지만, 또 어떤 때는 더러운 콘서트가 된다. 쓰레기 문제는 예측 불가능한 국면을 맞을 거다. 국민들의 윤리성에 몰빵한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다.
원문: 박현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