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실력’과 연결된 것을 모두 표기해보자.
- 학점은 실력을 반영하는가?
- 출신 대학은 실력을 반영하는가?
- 증명사진은 실력을 반영하는가?
- 외모는 실력을 반영하는가?
- 말주변은 실력을 반영하는가?
다음 중 ‘차별’과 연결된 것을 모두 표기해보자.
- 가족사항
- 키
- 몸무게
- 사진 속 외모
- 실제 외모
- 출신지
- 거주지(강남, 강북, 수도권/비수도권이 노출되는)
- 자기소개서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실력’과 연결되는 것은 1) 학점 2) 출신대학 3) 말하기 능력이다. 그리고 ‘차별’과 연결되는 것은 2) 키 3) 몸무게 4) 사진 속 외모 5) 실제 외모이고, 1) 가족사항 6) 출신지 7) 거주지는 사람에 따라 긴가민가 호오(好惡)가 갈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을 지시했다. 고용노동부가 마련한 세부안을 보면 ‘능력’과 ‘차별’의 경계가 뒤죽박죽이다. 금지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학교 ▲전공 ▲성적 ▲사진 ▲키 ▲체중 ▲가족사항 ▲출신지
다수의 상식과 달리 학점과 출신대학은 ‘능력’과 관계있는 것에서 제외됐다. ‘사진’이 금지된다면 그것은 아마 ‘외모’ 때문일 것이다. 그럼 ‘원판 외모’도 금지해야 한다. 즉, 면접관이 ‘원판 외모’를 접할 수 있는 ‘대면’ 면접도 금지해야 일관성이 있다.
또한 출신지를 금지한다면 ‘거주지’도 금지해야 한다. 출신지를 통해 드러나는 영남/호남이 문제라면 거주지를 통해 드러나는 강남/강북도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블라인드 채용은 정말 ‘눈을 가린(Blind)’ 채용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학교, 성적, 전공은 그 사람의 ‘능력’을 반영하지만 금지시켰다. 정보 제공을 차단하면 차단할수록 나타나게 될 현상은 경우의 수로 두 가지이다.
- 첫째, ‘능력’ 선발이 아닌 ‘운’에 의한 선발이다. 추첨제에 가까워진다.
- 둘째, 중요한 많은 ‘정보’가 차단됐기에 허용되는 ‘제한된 정보’의 가중치를 통해 유능한 사람을 뽑으려 할 것이다. 유력하게 예상되는 것은 ▲자기소개서 ▲논술 ▲구두 면접이다.
자기소개서는 ‘대필 시장’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논술과 구두 면접도 ‘취업 학원’의 필수 코스로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자기소개서 ▲논술 ▲구두 면접은 대치동을 비롯한 입시 학원가에서 수시-정시 시장으로 원래 있던 것들이다. 시장의 기본 인프라가 있으니, 취업 학원의 성행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블라인드 채용은 1) 사실상 ‘추첨제’ 성격으로 ‘실력이 아닌 운에 의한’ 채용으로 귀결되고, 2) 매우 제한된 정보로 유능한 사람을 뽑아야 하기에 자기소개서·논술·면접의 ‘취업 사교육 시장’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회경제적 이슈는 반드시 ‘풍선효과’가 작동한다. 풍선효과의 작동은 ‘예외’가 아니라 ‘상수’다. 행위자가 많고 대체재(=선택지)가 많고 정보는 비대칭이기에 감시-단속이 어려우며 상호 작용이 심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장’이란 놈은 재미있게도 법으로 금지시키면 ‘암시장’(=비공식 시장) 형태로 변신 로보트를 한다.
‘시장’의 특징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로 미국의 ‘금주법’을 들 수 있다. 노동절과 여성의 날 유래가 미국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제1차 세계대전 전후한 시기 여성운동이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 여성운동은 금주법을 요구하며 투쟁했고 1919년 드디어 승리했다.
‘술 시장’은 금지됐으나 술을 먹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과 술을 팔아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술 암시장’이 생겼다. 불법으로 인해 술 공급이 줄었기에 술값이 폭등한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알 카포네와 같은 범죄조직들은 술 암시장에 뛰어들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돈을 긁어모으게 된다.
술을 통해 인간의 타락을 없애려던 도덕주의적 사회운동은 인간의 타락을 강화해 암시장 성행, 범죄 증가, 범죄조직 활성화로 귀결됐다. 폐해가 너무 심해 결국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집권 후 폐지한다. 금주법처럼 ‘시장의 법적 금지’를 국가 전체로 확대한 것이 바로 소련식 사회주의 계획경제였다. 그러나 시장을 ‘법’으로 금지시켰던 사회주의 계획경제조차 암시장이 성행했다.
안타깝게도 경제학을 모르고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 한국 진보는 ‘시장 친화적’이란 표현을 접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시장 친화적’ 대안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펙 과잉과 차별 폐해는 막으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정보 제공을 차단해서 ‘눈을 가리는(Blind)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서 ‘눈에 보이게 만드는(Sighted)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정보를 네거티브’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보를 포지티브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출신대학 ▲학점 ▲토익/토플 역시 ‘능력’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다만 그것이 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학점-토익으로 환산되지 않는 다른 능력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게 뭐란 말인가?
다른 능력의 핵심은 열정, 경험, 잠재력이다. 그럼 이 녀석들을 어떻게 평가한단 말인가? 열정, 경험, 잠재력 평가는 정성적(定性的) 평가일 수밖에 없다. 주관적 평가를 다수에 의해 객관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하다.
- 먼저 평가항목으로 ‘열정, 경험, 잠재력’을 적극 인정한다.
- 입학사정관제와 유사한 평가위원회를 만들되 미국처럼 평가위원회 숫자를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예컨대 고졸 출신, 지방대 출신 경력자 등 평가위원회의 구성은 다채롭게 할수록 좋다.
- 평가위원회의 ‘다수의 주관’을 그대로 인정해줘야 한다. 다만 체조 채점하듯 최고점과 최하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까지 진도가 나가면 이러한 채용은 ‘본질’이 변하게 될 것이다. 정보의 차단을 통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아니라 더 많은 정보의 제공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을 적극적으로 보게 만드는 ‘사인티드 채용’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