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소비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좋아하는 책을 읽을 뿐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책을 읽고 있는 순간만은 적어도 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책이 나를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박주영 ‘백수생활백서’중에서.
마스다 미리의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는 서점 직원 경력 10년의 쓰치다가 주인공이다. 그녀의 여러 책 중 남자가 주인공인 책이 드물어 눈에 띄기도 하고 서점 직원의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소재가 흥미로워 단번에 읽게 됐다. 책에 보면 쓰치다가 병원에 입원한 큰아버지의 상태가 안 좋단 이야길 듣고 병문안을 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만화책임에도 내가 모서리를 꾸욱 접어놓은 이 부분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어이 신지, 요즘엔 어떤 책 읽냐?”’
“맞다! 요전에 미팅을 했는데~ 호시 신이치 책 이야기로 신이 났었어요. 내가 중학교 때, 큰아버지가 그 책 줬던 거 기억해요?”
“그랬나?”
“호시 신이치 이야기로 여자애랑 완전 의기투합해서!”
“잘됐어?”
“허망하게 차였어요…”
그 책 재미있으면 나도 빌려줘, 라는 말이 반갑다
병문안을 온 조카와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병실에 들어선 조카에게 어떻게 지내느냐, 바쁜데 어쩐 일로 왔냐, 라는 일반적인 질문이 아닌 “요즘 어떤 책 읽냐?”라고 묻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내 나이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 한 아이의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정엄마는 점심시간이 지난 1시쯤이면 오늘 점심으로 뭘 먹었느냐고 묻는 카톡 메시지를 (반드시) 보낸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이 장면을 읽은 뒤 엄마도 나에게 아주 가끔이라도 요즘 뭐 읽니? 라고 물어주면 좋겠단 욕심(?)이 생겼다. 어쩌면 쓰치다와 큰아버지에 대한 질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엄마가 그렇게 물어봐 준다면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책 내용이나 느낀 점에 관해 이야길 나누다가 엄마가 그 책 나 좀 빌려다오, 라고 말한다면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나마 가족 중에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네 살 터울 언니가 있는데 취향이 살짝 다르긴 하지만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길 나누고 다 읽은 책은 빌려주는 과정이 꽤 즐겁다.
사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언니가 다 읽고 책상 위에 던져놓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난 뒤 독서의 매력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내가 언니보다 훨씬 많이 읽지만, 그때만 해도 언니의 독서량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근데 한편으론 친정엄마가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면 내가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내 아들이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야 할 텐데 세 살인 아이의 미래를 아직까진 가늠하기 힘드니 좀 더 기다려 봐야겠다. 다행인 것은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매일 적어 보내시는 알림장에 아주 가끔 ‘OO 이가 책을 참 좋아해요’라고 적힌 메모를 볼 때면 엄마를 닮긴 한 건가 싶은 생각에 괜히 뿌듯해지기도 한다.
하기야 꼭 책이 아니면 어떠랴. 누군가에게 요즘 뭐가 가장 관심사인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묻는 것 자체만으로도 관계는 깊어질 수 있다. 책은 나의 관심사지 상대방의 관심사가 아닐 테니 내가 묻고자 한다면 그의 관심사를 세심하게 알아뒀다가 질문하면 될 것이다.
“요즘 너의 가장 큰 관심사가 뭐야?”
고심 끝에 한 나의 질문에 “관심사 따위 없는데”라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건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말이다.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편의점 도시락 신메뉴가 가장 큰 관심사라 할지라도 공감해주고 흥미롭게 들어주는 자세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끊임없이 자신의 관심사인 자전거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딴생각하며 고개만 끄덕였던 기억이 스친다. 나부터 잘하자.
원문: 이유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