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들어온 때는 병자호란 이후로 추정된다. 지금이야 흔한 물건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리를 볼록하게 하거나 오목하게 만들어서 사물을 잘 보이게 하는 안경은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만큼은 아니더라도 만들기 쉽지 않았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안경의 확산을 막은 것은 제작의 난이도나 가격이 아니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김준혁 교수는 저서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大同의 도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병자호란 이후 북경에서 안경이 들어왔는데, 눈에 쓰는 이상한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눈이 나쁘면서도 감히 사용하지 않았다. 안경은 이상한 물건이라는 일종의 미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로 안경을 쓴 국왕
이런 생각이야말로 미신이라 치부하고 안경을 처음 쓴 이가 있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였다. 정조는 안경을 ‘눈에 쓰는 이상한 물건’이 아니라 시야를 맑고 밝게 하는 ‘과학기술의 산물’이라 여겼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의 이러한 과학 정신과 창조 정신이 빚어낸 산물이다. 배를 이어 한강을 건넌 ‘주교(舟橋)’도 이렇게 탄생했다.
정조는 안경이 세상을 밝게 하듯, 과학기술이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조선 최초의 왕이었다. 정조는 다산 정약용에게 화성 축성의 임무를 맡기며 책 한 권을 건넨다.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이었다.
책의 저자는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요하네스 테렌스였고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제자였다. 테렌스는 스승의 과학기술 아이디어를 『기기도설』에 그렸다. 다산은 그 그림을 보고 거중기를 만들었다. 정조 시대, 갈릴레이의 과학기술 유산은 이렇게 조선으로 유입됐다.
고아 출신의 비천한 신분을 임용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채제공…….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아는 당대의 쟁쟁한 실학자다. 당시 명멸한 수많은 인재 가운데 김영(金泳, 1749~1817)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고아 출신의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수학과 천문에 천재성을 보였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직삼각형 변의 길이를 계산하고 월식이 일어나는 시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한다.
정조 13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길일을 잡아야 하는데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넘어 별자리의 위치가 어긋났다. 해시계와 물시계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때 해결사로 천거된 인물이 바로 김영이었다. 불려온 그 날 밤으로 김영은 왜 천문역법에 차이가 났는지, 그 차이를 어떻게 보정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가장 정확한 시간을 제시했다. 서양 역법에 근거한 해시계 ‘지평일구(地平日晷)’도 만들었다.
조정의 녹을 먹는 관상감의 전문가들조차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모습을 본 정조는 파격적인 임용을 단행한다. 관상감 역관으로 특채한 것이다. 다른 관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정조는 그를 믿었고, 김영 역시 오로지 실력으로 이 난관을 돌파했다.
‘개혁군주’ 정조는 과학기술로 부국강병을 꿈꿨다. 이런 왕에게 신하의 출신 성분과 이념적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규장각에서 그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벌였고, 창덕궁을 함께 거닐며 국사(國事)를 논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임금이 있었다.
그런 지도자를 다시 갖고자 소망하는 일이 과욕은 아닐 터. 요즘 미소 짓는 일이 늘어난 것은 그런 소망이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는지. 부디 성공을 기원한다.
원문: 책방아저씨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