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소리바다’라는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MP3 음악 파일 교환 서비스로 소리바다를 통해서 음악을 검색하면 해당 파일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용자를 연결해서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서비스였습니다.
이 서비스는 새롭게 등장한 MP3 하드웨어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이리버’ ‘코원’ 같은 국내 MP3 제조사들은 경쟁적으로 MP3기기를 출시했고 기기에 콘텐츠를 담길 원했던 이용자들은 소리바다에서 음악을 다운로드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용자들에게 “음악은 무료 콘텐츠”라는 생각이 강했죠. 돈 내고 음악 듣는 사람들을 요즘 말로 ‘호갱’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음악 산업계는 이러한 ‘디지털 음악 콘텐츠’ 태생으로 인해 한국 내 디지털 음악 콘텐츠의 유료화는 힘들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소리바다 탄생 후 17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전망과는 달리 많은 사람이 음악을 유료로 듣고 있습니다. 국내 최다 사용자를 확보한 음악 서비스 ‘멜론’은 2016년 연결 기준 매출액을 공개하면서 ‘멜론’의 유료 고객 증가 덕에 2016년도 4분기 음악 콘텐츠 매출액이 1,069억 원을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멜론의 유료 사용자는 현재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한 해 10만 명이 넘는 유료 사용자를 추가로 유치합니다. 다른 음악 서비스 ‘벅스’도 기존 유료 가입자 40만 명에서 지난해 4분기 기준 85만 명으로 훌쩍 뛰어오르면서 올해 흑자로 턴어라운드가 유력할 전망입니다.
이처럼 음악은 디지털 콘텐츠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유료화에 성공한 상품입니다.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은 디지털 콘텐츠를 운영하는 사업자는 여전히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음악은 디지털 콘텐츠의 효자 같은 역할을 하죠. 어떻게 사람들은 ‘음악’ 정도는 이제 돈 내고 듣게 된 걸까요?
1. 아무리 뒤져도, 없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소리바다가 2002년 불법 판결을 받고 서비스가 폐쇄되면서 대중적으로 알고 있던 MP3 유통 마켓이 사라졌습니다. 소리바다의 성공 사례를 보고 카피캣으로 비슷한 P2P 서비스들이 등장했지만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가 많아야 잘 되는 P2P 서비스 특성상 소리바다만큼 대중적이지 않은 곳에서 노래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어디엔가 분명히 공짜로 다운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 결과 네이버에서는 ‘어둠의 경로’를 찾기가 힘들어 구글에서 ‘MP3 다운로드’ ‘최신 MP3 다운’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서 “음악=공짜 콘텐츠”라는 인식을 확인받기 위해 불법 경로를 탐색했습니다.
하지만 음원 유통사들은 일찍이 ‘음원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음원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웹하드, 커뮤니티와 같은 ‘어둠의 경로’를 24시간 모니터링할 뿐 아니라 유통하는 사람과 유통 커뮤니티의 운영자를 모두 형사 고발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인터넷에서 공짜 음악의 씨가 마르고 결국 사용자들은 소리바다를 대신할 마땅한 대체재를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탐색 과정은 너무 길어졌고 아무리 찾아도 더 이상 못 찾겠다고 확신하고 나서야 “음악=공짜 콘텐츠” 인식이 깨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 들여가면서 MP3를 찾을 바에는 그냥 돈 내고 듣자’가 된 거죠.
무료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을 곳이 사라지면서 유료로 음악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나만 호갱인가?’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전에는 유료로 음악 듣는 사람이 ‘호갱’ 소리를 들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인터넷에서 공짜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아서 들을 수 있는데 돈을 내고 들었다는 거죠. 같은 것을 누구는 돈을 내고, 누구는 공짜로 즐기면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상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돈을 내고 즐기는 음악 콘텐츠”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며 “나 돈 내고 음악 들어!” 했을 때 ‘호갱 아니야?’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롱테일의 법칙이 적용되는 ‘음악 콘텐츠’
음악적 취향은 개인마다 매우 다릅니다. 같은 노래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호감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불호일 수도 있죠. 현존하는 음악적 장르는 매우 다양하고 전 세계에 수많은 뮤지션이 있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음악 콘텐츠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렇기에 음악 콘텐츠 시장은 일명 ‘롱테일의 법칙(Long Tail theory)’이 적용되는 곳입니다.
롱테일의 법칙이란 ‘80%의 사소한 다수가 20%의 핵심 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론입니다. 음악 서비스는 자사 서비스의 음원 재생 순위를 Top 100 같은 지표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용자는 Top 100이 아니라 내가 관심 있는 분야 또는 뮤지션의 노래를 듣습니다.
100명의 사용자가 있다면 20명가량은 Top 100을 듣지만 나머지 80명은 개인의 호감에 따라 다양한 음악을 선택하는 거죠. 몇십 년 전의 음원을 듣기도 하고 새로 뜨는 장르의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팔리지는 않지만 하루에 몇 번은 듣는 음악이 있는 겁니다. 그런 곡이 모이다 보면 상위 20%를 위협할 세력이 됩니다.
아직 일부 토렌트 사이트에서는 멜론 Top 100 노래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지만 그 이외의 곡을 즐기고자 한다면 창구가 없죠. 100명 중 20명은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서 음악 콘텐츠를 즐길 수 있으나 나머지 80명의 사용자는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듣고자 유료 음원 사이트에 가입하고 돈을 지불하며 콘텐츠를 즐기게 됩니다.
이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직까지도 유료화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선택의 폭이 음악만큼 넓지 않습니다. 물론 인디영화, 독립영화 등도 있으나 아직 드라마나 영화는 대중적인 선택이 또 다른 선택의 기준이죠. 롱테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분야입니다.
드라마 및 영화는 일반적인 롱테일의 법칙과 달리 80명은 ‘핵심 다수’가 되고 20명은 ‘사소한 소수’가 되는 콘텐츠입니다. 소수의 콘텐츠만으로도 100명 중 80명은 잡을 수 있기에 토렌트 사이트들은 이런 드라마, 영화 콘텐츠를 인터넷상에 불법으로 제공하고 사용자들 역시 암묵적으로 ‘공짜’로 즐기고 있습니다.
3. 스마트폰으로 디바이스 통합, 그리고 스트리밍
MP3가 처음 등장할 때는 휴대폰과 MP3기기는 하드웨어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MP3기기는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았기에 USB를 통해 컴퓨터에서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세상은 바뀝니다. 앱 하나만으로 MP3 하드웨어를 대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결국 휴대폰과 MP3기기는 하나로 합쳐집니다.
사람들은 굳이 컴퓨터로 다운로드 받은 뒤 폰으로 옮기려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찾은 대체재가 바로 ‘스트리밍’입니다. 인터넷에 연결된 상태에서 원하는 음악을 재생 버튼만 터치하면 들을 수 있죠.
그러면서도 음악이 차지하는 용량은 0입니다. 음악 서비스의 클라우드를 이용해서 음악을 듣기 때문입니다. WiFi 상태에서는 상품 이용 요금만, 아닐 때는 데이터 비용만 추가로 지불하면 됐습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음악 콘텐츠 이용 습관이 바뀌는 중요한 지점이 왔습니다. 다운로드 위주였던 콘텐츠 소비 형태가 스트리밍이라는 형태로 바뀐 거죠.
또한 모바일 데이터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데이터 중심 요금제로 스마트폰 요금제가 개편되면서 음악 서비스 업체가 ‘무제한 스트리밍’ 상품을 출시한 것도 결정적이었습니다.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내가 원하는 곡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겁니다.
4. ‘착한 소비자’가 되기 위한 의식 변화
몇 년 새 콘텐츠 저작권에 대한 시민 의식은 진일보했습니다. 예전에는 저작권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콘텐츠를 사용했거나 무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렇게 하면 큰일 나죠.
음악, 사진, 영상, 일러스트레이션 등 즐기는 디지털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점점 디지털 콘텐츠가 경제적 재화임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임을 깨닫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이제 ‘불법적으로 공짜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착한 소비자’가 되기 위한 소비자들의 의식 변화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나만 즐기는 소비가 아니라 이 재화를 만든 생산자도 함께 고려하자는 운동입니다. 이를 통해 유료로 음악을 즐기면서 ‘나는 이렇게 의미 있는 소비를 하는 착한 소비자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5. ‘발견의 재미’가 중요해지다
예전에 MP3를 다운로드 받을 때는 노래 제목 또는 뮤지션 이름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음원 정보를 알아야만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능동적 소비’였죠. 물론 이런 소비 행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래 정보를 알아두었다가 음악 서비스에서 검색해서 음악을 들어봅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용자들이 더 선호하는 기능은 ‘발견의 재미’입니다.
음악 서비스를 유료로 이용하면서 ‘발견의 재미’가 가능해졌습니다. 일명 ‘큐레이션’ 서비스입니다. 음악 서비스에서 만날 수 있는 큐레이션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사용자가 듣는 음악 취향을 파악해서 ‘좋아할 만한 노래’를 추천해주는 방식, 두 번째는 음악 사용자나 멜론, 벅스 등의 콘텐츠 공급자 측에서 편집한 ‘테마별 노래 리스트’입니다. ‘드라이브할 때 들을만한 노래’ ‘조용한 카페 노래’ 등이죠.
대부분의 유료 가입자가 무제한 스트리밍 상품을 이용하기에 제안해주는 노래들을 아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맘에 드는 노래는 ‘좋아요’ 또는 ‘찜’을 눌러서 내 플레이리스트에 옮겨 놓죠. 그렇게 내 ‘취향 저격’하는 노래를 하나씩 발견해 가는 재미를 찾아가게 됩니다.
MP3 시대에는 내가 알고 있는 노래만 찾다가, 유료로 무제한 스트리밍 상품을 이용하며 내가 선호하는 장르/뮤지션과 비슷한 노래를 ‘제안’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좋은 노래를 발견하면서, 유료로 음악을 듣는 점에 대해 충분한 ‘가치’를 느끼게 되죠.
하지만 음악 서비스들은 ‘진흙탕 싸움’ 중
디지털 상품 중 음악은 유료 콘텐츠로 자리를 잡았지만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음원 사이트별로 ‘가격’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환승해가며 이용하는 유료 사용자가 많습니다. 어느 한 쪽 음악 서비스에서 프로모션을 하면 그쪽으로 갔다가 다른 서비스에서 프로모션을 하면 또 옮겨가는 식이죠.
대표적인 예가 벅스의 ‘니나노 클럽’입니다. 2015년 12월, 벅스는 간편 결제 서비스 ‘페이코’와 손잡고 ‘니나노 클럽’ 프로모션을 시즌 4까지 진행했습니다. 가입 후 6개월~1년간 월 900원(시즌2) 또는 3,000원(시즌3)에 제공하면서 이후엔 8,900원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년 2개월가량 니나노 클럽을 제공하면서 유료 가입자를 40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강도 높은 프로모션으로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자 새로운 가입자를 받는 프로모션은 종료했습니다. 비록 많은 프로모션 이용자가 유료 가입자로 전환되었지만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프로모션으로 결국 벅스는 작년 적자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유료 디지털 콘텐츠로 자리 잡게 된 ‘음악’ 콘텐츠. 소비자들은 이제 음악 콘텐츠에 대해 지갑을 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차별화된 콘텐츠가 아닌 가격으로 차별화를 주면서 음원 서비스 시장은 진흙탕 싸움이 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처럼 오리지널 콘텐츠를 통해서 유료 가입자를 유치할 수도 있고 스포티파이처럼 ‘Music Discovery’를 추구하면서 큐레이션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작업을 통해 차별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서비스가 시장의 승기를 잡을지, 누가 더 사용자를 락인할 셀링 포인트를 가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원문: 생각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