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정변에 실패한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오랜 도피 생활을 했다. 낯선 조선사람이 다가오면 고종이 보낸 암살자일까 늘 노심초사했고, 조선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두려워한 일본은 그를 홀대했다. 그러나 결국 김옥균은 고종이 보낸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1894년 3월 28일 상해에서의 일이었다.
그렇게 김옥균을 암살한 인물 정도로만 알려진 홍종우가 이승만을 살렸다니,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최근 출간된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1898년 만민공동회가 한참 열기를 띨 무렵 독립협회 강경파를 주도했던 이승만은 한 미국인의 집에 숨어있다 체포당해 서소문 안 감옥에 수감된다. 그는 1899년 1월 30일 같은 독립협회 회원이자 나란히 수감된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리볼버 권총을 들고 탈옥한다. 일행에서 뒤처진 이승만은 감옥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마침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군사들과 맞닥뜨리게 됐고, 다시 붙잡히고 만다.
서상대는 끝까지 잡히지 않았고 최정식은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혀 이승만과 같이 법정에 서게 된다. 이 재판에서 최정식은 자신이 아닌 이승만이 탈옥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증언을 듣던 판사가 이상한 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탈옥할 때 선두에 선 최정식이 총을 세 발이나 발사하는 동안 이승만은 한 발도 쏘지 않은 점을 판사가 지적한 것이다. 결국 최정식은 교수형을, 이승만은 태형 백 대를 선고받는다. 이 재판의 판사는 홍종우다.
당시에는 원인 불명의 폭탄 테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립협회와 대립한 황국협회의 핵심인물이자, 김옥균을 죽여 고종의 총애를 받는 홍종우로서는 이승만에게 사형판결을 내린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심지어 이승만 자신도 홍종우가 재판장으로 있는 한 살아남기 어렵다고 각오한 듯 훗날의 자서전에서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야릇한 인생의 역전이었다.
그렇다면 홍종우는 왜 그렇게도 증오하던 독립협회의 강경파 이승만을 굳이 살려줬을까? 이 책의 작가 정명섭은 그 이유로, 홍종우가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론자의 길을 걸었지만, 법관으로서는 ‘원리원칙주의자’였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홍종우는 조정에 등용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걸핏하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우국지사 황현도 <매천야록>에 홍종우가 잘못된 폐단 수천 가지를 열거한 상소에서 여러 신하와 고종의 실책을 꾸짖었다고 기록했다.
홍종우의 삶에 한걸음 더 들어가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몰락한 양반이었다. 당시 고종은 외국여행을 갔다 온 사람들을 불러서 이야기를 듣고는 재미있으면 벼슬을 내려줬는데, 이를 ‘별입시(別入侍)’라고 불렀다. 『이왕의 자객』의 작가 이오야기 미도리는 홍종우가 별입시를 노리고 일본행을 결심했다고 썼다. 일본에 건너간 홍종우는 휘호를 써주며 돈벌이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그는 1890년 프랑스행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제1호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행보는 유별났다. 갓에 도포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고, 호구지책으로 <춘향전> <심청전> 등을 번역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못해서 일본어로 구술하면 다시 프랑스어로 옮겨 적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인다. 두 작품의 내용이 원작과는 차이가 있어 번역이라기보다 ‘번안’에 가깝다. 또한 그는 사교계 모임의 연설에서 조선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배우려고 이곳에 왔으며, 강력한 주변 국가들 때문에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렇듯 개화파 사상에 가까웠던 홍종우는 왜 조선으로 돌아가서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전제 정치체제를 옹호하게 됐을까? 이는 몰락한 양반으로서의 출세욕과 프랑스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서구 제국주의가 감춰놓은 야심을 간파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 그를 후원했던 펠릭스 레가메의 회고다.
“프랑스에서 뭐가 좋았습니까?”
“말들이오. 마르세유에 도착해서 봤는데 크고 튼튼해 보였소.”
“나빴던 것은 뭐였습니까?”
“이기주의였소.”
이 책의 작가 정명섭은 홍종우와 김옥균을 비교하면서 ‘방향은 같지만 길이 다르다’라고 표현했다. 홍종우는 왕권 아래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고, 김옥균은 급진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또한 정명섭은 대한제국의 탄생은 ‘처량한 종말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라고 썼다. 우리는 사드 배치문제부터 위안부 합의 문제까지 중국과 일본의 등쌀에 시달리고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또 그런 비극을 겪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홍종우와 김옥균, 이승만을 복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원문: BOOKLOUD